[이용석의 낮은 시선으로부터] 쓰레기들의 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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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든 불의는 모든 곳의 정의를 위협한다는 뜻의 피켓
ⓒunsplash

[더인디고=이용석 편집위원]

쓰레기만을 양산하는 사람이란 존재

이용석 편집위원
이용석 더인디고 편집위원

세상에서 쓰레기를 양산하는 존재는 사람밖에 없을 것이라며 한 지인은 쓰게 웃었다. 자신은 지금도 끊임없이 쓰레기를 만들어 내고 있으며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세상에 유해한 존재라는 거다.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일생을 쓰레기나 생산하는 존재에 불과한 ‘사람’은 다시 자신 중에서 버려질 존재들을 구분해내기 위해 평생을 분투한단다. 그 지당한 말에 섭섭하고 외롭다.

쓰레기만을 양산하는 존재라니, 그동안 우리가 누려왔던 찬란한 문명조차 어쩌면 오롯하게 ‘사람’만을 위한 것들뿐이었고 세상을 위한 것은 단 하나도 없다는 생뚱맞은 생각에서 좀체 벗어날 수가 없다. 문자나 법, 제도 등 무형의 인류 자산은 물론이고 끊임없는 파괴를 통해 번성한 도시와 이기(利器)들까지 모두 ‘사람’을 위한 것들뿐이라는 사실은 ‘사람’ 이외의 존재들에게는 두려움이기도 했겠다 싶으니 모골이 송연하다.

올해 인류 전체를 뒤덮은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세상에 쓰레기나 쏟아내는 ‘사람’에게 주는 경고일지도 모르겠다. 이 경고는 물론 종교에서 얘기하는 신의 심판 따위의 신파가 아닌, 세상의 주인인 양 행세해 왔던 ‘사람’들의 삶의 잣대를 뒤틀어놓는 기회일 수도 있겠다.

멈춰버린 시간, 아니다. 시간은 가고 있되 그 시간과 함께했던 사람의 것들만 멈추었다. 기억에 남는 모든 것들이 그저 먹고 마시는 일상에서의 최소한의 것들만 남아서 한참 세월이 지난 후 그 잔해는 추억이라는 기억이 아닌 경험의 잔해로만 남을 듯하다.

10%를 희생시키는 이유

어제 소주를 반주 삼아 저녁을 해결하는 중에 황당한 뉴스를 접했다. 한 어린이집 교사가 한 아동에 대해 학대를 일삼았는데 이 일이 문제가 되자 다른 아동 부모들에게 그 아이가 자폐 증상이 있어 보여서 그랬다고 해명을 했다는 거다. 자폐 증상이 있는 아이를 학대했다는 건지, 자폐 증상이 있어 보여서 학대했다는 건지 아니면 몇 잔 술기운 때문인지 그 뉴스를 나는 좀체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폐 증상 여부와는 상관없이 아동에 대한 학대행위는 명백한 범죄다. 다만 내가 경악한 이유는 자폐 증상이 있어 보여서 아이를 함부로 대했다는 어린이집 관계자의 해명이다. 그 해명을 뒤집어보면 자폐 증상이 있는 아이는 학대를 해도 된다는 거다. 자폐성 장애가 있는 아동의 훈육은 고작 학대뿐일까, 또 아동학대의 혐의가 짙은 어린이집의 해명이 고작 장애아동인 듯해서 학대했다고 하면 이해되고 용서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판단의 근거는 대체 뭘까?

짐작해 보자.
우선 자폐성 장애가 있는 아동은 교육이 어렵고, 보육 상황에서 일어나는 돌발 행동에 대한 대처로 억압적인 신체 제어 또는 위협적인 훈육이 필요하다고 모두가 알고 있다고 여긴 때문이 아닐까. 또 한 가지, 학대의 대상이 그 어린이집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비장애아동이 아니라는 변명은 결국 장애아동만이 학대의 대상이니 비장애아동의 학부모들은 안심해도 된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전형적인 소수자에 대한 차별적 인식이고 장애를 바라보는 편협한 사고다. 쓰레기 같은 변명을 늘어놓는 것은 자유겠지만 그런 해명을 학부모들이 공감하고 안심했다면 이들 또한 쓰레기다.

이렇듯 우리 사회는 10%를 희생시키면 해결할 수 있는 위기라고 판단하면 지체 없이 실행한다. 그 희생을 결정하면 90%에게는 합리적인 선택이겠지만, 10%의 희생자에게는 삶의 100%가 다 망가지기도 한다. 뭐, 그럴 수 있다. 남의 일이니까, 남의 자식의 문제니까 혹은 나와 상관없는 장애인의 문제로 치부하면 자신들은 다시 평화로운 일상을 살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사는 90%는 다시 위기가 찾아오면 개중 누구라도 희생시켜버릴 수 있다는 합의를 손쉽게 이루게 될 것이다. 그리고 모두의 평화로운 일상, 다수의 안정된 일상을 위해 누군가는 또 희생되고 지워질 것이다.
정말 그들의 바람처럼 희생당할 걱정이 없는 90%가 존재하기나 할까.

모두가 쓰레기가 되지 않는 방법

간혹 양심과 도덕을 묻는데 불법이 아니라고 반박하는 경우가 있다. 법의 위반인지 아닌지 여부는 법원이 판단할 일이고, ‘사람’ 간의 관계에서는 또 다른 방식의 더 엄격한 잣대가 있다는 사실을 외면한다. ‘사람’의 일생이 쓰레기를 양산하는 과정이라도 불법은 아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쓰레기를 양산하는 대신에 비용을 지불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쓰레기를 양산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지만,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는 행위는 비난받는다. 그런데 쓰레기를 버리는 행위는 불법인데, 쓰레기를 양산하는 행위는 불법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자폐성 장애가 있는 아이를 폭력으로 훈육해도 된다는 편견은 비록 정신적 쓰레기를 양산하는 행위지만 불법이 아니다. 하지만 그 쓰레기 같은 생각이 말과 행동으로 발현되는 순간, 불법이 되고 쓰레기가 된다.

쓰레기를 양산하지 않고 사는 길은 없다. 또 쓰레기를 버리지 않고 사는 방법 또한 마땅치 않다. 그러나 스스로 쓰레기가 되지 않는 방법은 차고도 넘친다. 세상에 손톱만큼도 기여하지 않는 ‘사람’이여, 부디 쓰레기가 되지 않기 위해 경계하고 또 경계할 일이다. [더인디고 The Indigo]

오래 전에 소설을 썼습니다. 이제 소설 대신 세상 풍경을 글로 그릴 작정입니다. 사람과 일, 이 연관성 없는 관계를 기꺼이 즐기겠습니다. 그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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