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석의 세상풍경] 기생하는 삶, 그 신산스러운 풍경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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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네이버 무비>
  • 내 삶의 위치에서 보이는 열 가지 풍경, 하나

[더인디고 이용석 편집위원]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제92회 아카데미에서 무려 4관왕의 쾌거를 이뤄냈다. 이번 수상은 백인 중심의 아카데미 시상 패턴에서는 매우 이례적인 수상이라고 한다.

미국 중심의 백인 사회 이벤트인 아카데미에서 우리나라의 자본과 영화적 상상력이 인정받게 되었다는 사실이 그리 대수일까 싶지만 전 세계 영화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미국의 대표적인 이벤트인 만큼 매우 기념비적인 일이라 할 수 있겠다. 어쨌든 축하할 일이다.

이용석 더인디고 편집위원

그런데 영화 <기생충>의 아카데미 수상의 여파는 황당하게도 가난 혹은 빈곤의 전시와 구경으로 이어지고 있다. 서울시는 <기생충> 촬영지를 돌아보는 팸투어를 기획하고 있으며 이를 관광코스로 개발하는 방안도 구상 중에 있다고 발표했다가 빈곤 포르노를 이용한 전형적인 푸어리즘(poorism)이라는 호된 비판을 받았다.

당연한 비판이다. 그 곳은 촬영지이기 이전에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터전이며 어느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삶의 근거지다. 가난한 동네라는 것과 촬영지라는 조건이 그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다른 사람들이 구경할 수 있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

가난의 상품화 시도는 잊을 만 하면 등장해 아연케 한다. 서울시는 대학생 쪽방 체험 프로그램인 ‘캠퍼스 밖 세상 알기-작은방 사람들과 마음 나누기’ 사업을 발표했다가 가난의 상품화라는 호된 비판을 받고 철회했다.

또 2015년 인천에서는 동화작가 김중미가 인천의 빈민촌인 만석동 달동네를 배경으로 쓴 ‘괭이부리말 아이들’이 유명세를 타자 ‘쪽방촌 체험관’을 상품화하려던 적도 있다. 우리나라뿐만이 아니다. 가난의 상품화는 집요하게 시도되고 있으며, 이미 상품으로 판매되고 있다.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로의 빈민가 ‘파벨라’는 아예 ‘빈민가 투어’라는 관광 상품이 되어 가난의 풍경을 이채로운 볼거리로 절찬리(?)에 판매되고 있다. 이외에도 인도의 뭄바이, 남아공의 스웨토, 케냐의 키베라, 멕시코의 멕시코시티 등도 가난한 풍경과 체험이 상품이 판매되고 있는 곳은 수도 없이 많다.

다시 시선을 돌려보자.

그렇다면 <기생충>은 상품화를 시도할 만큼 가난을 주제로 계급갈등을 이야기하는 영화일까? 영화의 줄거리는 단순하지만, 화면마다에는 봉준호 감독 특유의 상징으로 가득 차 있다.

<기생충>은 이름에 기생충이라는 상징적 기호를 노골적으로 포함하고 있는 기택의 가족이 겪는 반지하방에서의 과장된 에피소드들을 보여주면서 빈곤 상황을 극대화한다. 영화는 기택 가족이 박 사장네 지하에 숨어 살던 문광의 남편 근세의 존재를 알게 되고, ‘기생’의 준비를 마친 기택이 “냄새가 선을 넘어 온다”는 박 사장의 말에 살인이라는 극단의 결말을 맺는다.

극단의 결말을 위한 상징인 ‘냄새’를 비롯해 ‘수석’, ‘핏자박스’ 따위의 상징을 통해 영화는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의 빈부격차를 노골적으로 보여주고, 서로의 ‘냄새’를 공유할 수 없는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 간의 위치를 지하와 저택이라는 극단의 공간을 배치해 보여준다.

반지하 혹은 지하라는 공간은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 듯한데, 지하는 기태 기족의 주거공간이기도 하고, 박 사장네 기생의 기득권자인 문광과 그 남편인 근세의 공간이기도 하다. 다만 기태 가족의 반지하는 언덕길과 계단이라는 수직적 질서를 통해 숙주에게 다다르며 기생의 기득권자 문광과 근세는 집안의 복잡한 지하 미로를 통해야만 가능하다.

반지하, 혹은 지하라는 공간은 숙주인 박 사장네의 안(內)에서 기생하거나 밖에서 기생하려는 기생충들의 치열한 싸움의 장소이기도 하고 서식지이기도 하다. 영화는 이렇듯 기생충들 간의 영역싸움과 또 숙주와 기생충들과의 싸움을 통해 모두 파멸에 이르는 과정을 보여줄 뿐 그 어디에서도 가난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숙주와 기생충, 기생충과 기생충 사이에서 일어나는 공존과 반목, 파멸의 과정을 통해 숙주의 삶, 기생충의 삶이 혼재될 수밖에 없는 을씨년스러운 세상 풍경을 보여줄 뿐이다. 감독이 이 영화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는 관심도 없고 알바도 아니다. 내가 영화를 통해 목도한 것은 빈곤도, 계급간의 갈등도 아닌 그저 저열하게라도 살아내고자 애쓰는 군상들의 신산스러운 풍경일 뿐이다.

가난 혹은 빈곤은 지극히 상대적 개념이었다.

가난한 것은 경제적 조건을 비교하는 상대에 의해 결정되며, 그 상대는 당연히 가변적이기 때문에 가난함은 정량화된 조건이 아닌 심리적인 이유가 오히려 컸다. 하지만 자본주의 체제가 극대화된 오늘날의 가난은 국가가 정한 정량화된 조건을 통해 표준화된 틀에 의해 규정된다.

<기생충>의 등장인물들이 처한 경제적 조건은 신산스러운 풍경을 그리기 위한 물감이고 붓일 뿐이지 가난 그 자체는 아니다. 무려 아카데미상 4관왕에 빛나는 <기생충>이 자랑스럽다면, 영화의 유명세를 한낱 가난을 상품화에 이용할 것이 아니라 잠재력이 입증된 만큼 영화산업을 지원하거나, 1년에 단 한 편의 영화조차 볼 수 없는 문화소외계층을 위한 사업들이 구상되고 발표되었어야 했다.

누군가에게는 죽고 싶을 만큼 혹독한 고통인 가난을 전시하고, 즐기려는 오만한 정책 따위는 부디 사라지기를 바랄 뿐이다. 행여 영화읽기에 과문한 내가 눈치 채지 못한 ‘가난코드’가 숨어있을 수도 있겠지만, 아무려나 그저 나는 한 사람의 관객일 뿐이다. [더인디고 The Indigo]


고민이다. 글쓰기라는 발화방식을 통해 나의 생각을 전하는 행위는 고리타분한 일이다. 글을 쓰는 행위는 결국 ‘나’라고 하는 1인칭의 좁디좁은 세계 안을 톺아보는 지난한 여정이며, 이 여정 속에서도 어쩔 수 없이 ‘나’를 검열해야 하는 피곤하고 무모한 작업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글쓰기를 선뜻 수락한 이유는 단 하나다. 글쓰기가 갖는 힘. 어딘가에 기록되는 발화의 힘은 어쩌면 삶의 위치에 따라 달라질 텐데 기록되는 발화 즉, 글쓰기는 약자만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무기라는 믿음 때문이다. 내 삶의 위치에서 보이는 풍경들. 나의 눈높이에서는 보이되, 그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그 신산스러운 풍경들을 드러내는 행위가 ‘나’의 글쓰기이며 내 삶의 위치에서만 가능한 대안적 태도라는 믿음 때문이다. 결국 기록되는 발화의 힘은 그들과 품위 있게 싸우는 유일한 방법인 것이다. 비록 오래 전에 미뤄둔 글쓰기여서 팬 끝은 무뎌지고 녹이 슬었지만 애써 벼리며 시작하려 한다.
승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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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068e7b8d365@exampl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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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kmo72@gmail.com'
leevom
4 years ago

김중미의 괭이부리말 아이들은 오래전 아이들의 권장도서여서 꽤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가난 체험이라는 것 자체는 의도면에서는 나름 좋게 볼 수도 있겠지만 작가님 처럼 좀더 깊이, 넓게 보는 안목을 정책을 펴는 사람들이 가져야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