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승준의 다름알기] 희망과 희망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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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손에서 자라듯이 손가락 사이로 올라온 새싹
마치 손에서 자라듯이 손가락 사이로 올라온 새싹/ⓒunsplash
안승준 집필위원
안승준 더인디고 집필위원

[더인디고=안승준 집필위원]  시답지 않은 농담을 주고받는 재미로 만나던 친구들은 언제부터인가 서로에게 희망 섞인 덕담을 건네느라 바쁘다.

“너도 얼른 장가가야지. 눈만 조금 낮추면 너만 한 신랑감이 어디 있다고!!“

“술 조금만 줄여. 넌 원래 건강 체질이라 운동 조금만 하고 그러면 금방 건강해질 거야!“

“너 정도 청약점수면 어디든 분양 당첨 가능해.“

당장 무언가 변하는 건 아니지만 듣는 녀석이나 말하는 친구나 희망 섞인 말들은 서로의 기분을 좋게 만든다.

오래전 의사 선생님도 어린 나이에 시력을 잃은 나에게 그런 마음으로 말씀하셨던 것 같다.

“하룻밤 자고 나면 괜찮을 거야.”

“수술의 충격이 크면 사흘 정도 시력이 돌아오지 않는 아이들도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렴.”

“한 달 있다가 다시 진료해 보자. 아무 일도 없을 거야.”

하루, 한 달, 1년이 지나도 시력 상태가 회복 기미를 보이지 않자 의사 선생님은 어린이에게 급기야 “5년만 지나면 의학이 발달해서 어떻게든 볼 수 있을 거야.”라는 마지막 소견을 남기셨다.

웬만해서는 긍정적인 예후를 말하지 않는다는 의사 선생님마저도 아직 두 눈 초롱초롱한 어린이에게 ‘시각장애’를 선고한다는 것은 쉽게 결정하고 실행으로 옮길 수 있는 일이 아니었던 것 같다. 어쩌면 그분이 생각한 시각장애는 교회에서 말하는 지옥 불이나 법정에서의 사형선고처럼 되돌릴 수 없는 최악의 상황이었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선생님의 선한 의도는 어린 나에게 있어서는 친구들의 덕담과는 많이 다른 효과를 내고 있었다.

처음 며칠간, 길게는 처음 몇 달, 더 길게는 몇 년 정도는 선생님 말씀이 내게 있어 갑작스러운 변화를 견디고 참아내는 데에 적지 않은 힘이 되었다. 답답했지만 끝이 있다기에 괜찮았고 힘들었지만 나아지고 있다기에 견딜 수 있었다.

그렇지만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알게 된 명확한 현실은 그동안 나를 버티게 해 주었던 의사 선생님의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었음을 깨닫게 했다.

몇 년간의 치료도 그동안 세워두었던 계획들도 아무런 의미 없는 것들이 되어버렸다. 좋은 마음으로 건넨 몇 마디 말들이 오히려 나의 학년 기를 늦추고 몇 년을 허송세월하는 결과가 되었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만약 좀 더 일찍 장애를 알고 인정했다면 난 좀 더 빠르게 무언가를 준비하고 조금 더 시간을 절약했을 것이다. 희망을 주는 것은 좋지만 내게 주어졌던 그것은 방향이 많이 틀려 있었다.

장애는 치료의 대상이 아니라 다른 모양의 적응을 목표로 한다. 하나도 보이지 않는 글씨들을 부여잡고 조금이라도 보이지 않을까를 생각할 시간에 난 얼른 점자 공부를 해야 했다. 내게 맞는 치료 방법이 있을까 돌아다닐 시간에 지팡이를 짚고 보지 않고도 걸는 방법을 훈련해야 했다. 가던 길이 막혀버렸을 때 다시 열리기를 멍하게 기다리기보다 다른 길로 가는 법을 얼른 훈련해야 했다.

내 친구는 눈만 조금 낮추면 정말 장가갈 수 있고 또 다른 내 친구는 지금처럼만 노력하면 머지않아 집을 장만할 수 있겠지만, 나의 시력은 노력한다고 돌아오는 것이 아니다. 지금은 그렇다.

그렇지만 그것은 희망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다른 희망을 품어야 하는 달라진 모습이기에 절망할 필요는 없다. 좋은 말 건네는 사람 중 많은 사람이 “너도 곧 볼 수 있는 날이 올 거야.”라는 멘트를 날리곤 한다.

마음은 고맙지만 그런 덕담은 정중히 사양하고 싶다. 그건 남성으로 사는 것이 힘들다는 이에게 “너도 노력하면 금방 여성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을 거야.”라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지금의 의학 수준에서는 그렇다.

그런 이들에겐 어떻게 하면 남성으로도 괜찮은 삶을 살 수 있는지 현실적 대안을 함께 찾아주는 것이 최선이다. 희망을 건네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지만 정확히 알고 방향을 제대로 잡아야 한다.

갑자기 눈이 보이지 않게 된 친구에게 아무렇지 않게 이렇게 덕담을 건넬 수 있는 세상이었으면 좋겠다.

“불편하긴 하겠지만 얼른 점자도 배우고 재활 훈련도 하자! 조금만 노력하면 금방 적응하고 살 수 있을 거야. 다르게 사는 게 생각보다 아주 나쁘지는 않아!”

[더인디고 THEINDIGO]

한빛맹학교 수학 교사, "우리는 모두 다르다"를 주장하는 칼럼리스트이자 강연가이다. 밴드 플라마의 작사가이자 보컬이다. 누구나 불편하지 않은 세상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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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myn5@naver.com'
이영실
3 years ago

좋은 글 잘읽고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