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승준의 다름알기] 81년생 안승준

0
206
남녀평등
남녀평등/ⓒPixabay
안승준 집필위원
안승준 더인디고 집필위원

[더인디고=안승준 집필위원] 나는 ‘81년생 안승준’이다. 몇 년 전 비슷한 제목을 가진 소설 속 주인공의 삶에서 보았듯 내가 어릴 적엔 남아선호, 남존여비 같은 단어를 거리낌 없이 주장하던 어른을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었다.

명절 제사 때에는 아장아장 걷는 녀석들도 남자 딱지 붙었으면 당당히 제사상 앞에 절을 올릴 수 있었지만, 그 달랑거리는 표식 없이 태어난 여성들은 집안 최고 어른인 할머니조차도 주방 구석에서 음식 나르는 일을 하는 것이 익숙했다.

같이 학교 다니던 녀석 중엔 서너 명 이상의 언니나 누나가 있는 딸 부잣집 친구들이 많았다. 언니 부자나 누나 부자나 모두 어느 집안의 대를 이어가야 한다는 사명으로 부모님이 수년 동안 사내를 낳기 위해 노력한 증거이자 결과들이었다.

같은 날 온종일 집안일 하시는 어머니와 하루 종일 쉬고 계시는 아버지가 동일한 공간에 있는 것도 큰일 할 사내와 내조하는 현모양처라는 이유 하나로 의문조차 가지지 않고 납득했었다.

남녀평등, 천부인권 따위를 학교에서 가르쳐 주었지만 사내 녀석이 인형 가지고 놀면 고추 떨어진다고 말씀하시던 가정교육이 내 사상을 구조화하는 데 훨씬 큰 영향을 끼쳤던 것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다.

그런 연유로 난 나름 가방끈 늘여가며 배웠다는 소리 좀 듣던 대학생 때까지도 페미니즘이 무엇인지 여성운동은 왜 필요한지에 대해 공감하거나 이해하지 못했다.

20여 년이나 다져지고 굳어진 생각들이 깨어지고 부서지고 변하는 것은 책을 읽고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진보적인 척, 앞서가는 생각을 하는 척 멋을 부리고 흉내를 내 보기도 했지만 그건 내 삶이 되고 사상이 되는 것에 큰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여성운동 하던 친구들과 밤새 술자리에서 논쟁을 벌이기도 하고 좋아하던 여학생에게 모욕적인 언사도 들어가면서 온몸으로 체감하는 충격을 겪고 나서야 고리타분한 생각들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언행도 몸짓도 조금씩 변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수많은 생각과 고민 그리고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비로소 진정 나의 가치가 되어갔다.

여학생에게 지는 것은 수치라고 교육받았던 내가 여성의 인권에 대해 조금이나마 고민할 수 있는 상태 정도는 되었다.

장애라고 하는 또 다른 소수, 약자성을 가지게 된 것은 나와 다른 이성의 인권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바라보는 데에 제법 큰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내 이전의 모든 생각이 나와 다른 이들이 설득하고 끌어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바뀐 것은 아니다.

때로는 종교적 신념으로, 또 다른 무엇은 단단한 논리 이전의 생각이 새로운 것으로 바뀌는 것을 허락하지 않기도 한다.

내가 가진 지금의 생각은 여전히 많은 부분 틀릴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적어도 난 그것이 옳지 않은 것이라고 납득되는 순간 언제든 바꿔 갈 준비는 되어 있다고 자부한다. 그러기에 난 이야기하고 토론하고 논쟁하는 것을 즐긴다.

목소리가 높아지고 감정이 소모되는 때도 있지만 그런 과정들 속에서 사람들을 현시대에 맞는 이상적인 방향으로 설득하고 끌어낸다.

격론이 오가고 총칼 없는 전쟁이 벌어지지만, 인간들은 좀 더 옳은 가치를 공유하고 더 나은 방향으로 서로를 이끌어 간다는 명분으로 그것을 토론이라고 부른다. 나 또한 그런 시간 속에서 조금씩 성장해 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얼마 전 일본 출신 한 방송인의 비혼모 선언으로 여기저기에서 토론의 장이 벌어지고 있다.

엄마, 아빠 그리고 자녀로 이루어진 일반 가정에 익숙한 이들에겐 일면식 없는 이의 정자를 기부받아 엄마가 되기로 한 그녀의 결정을 이해한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일 것이다.

이전의 가족 형태를 정상 가족이라고 단정 짓는 사람들에게 그녀의 결정은 이기적인 일탈로 보일 수밖에 없다.

반면에 다양한 미래 가족 형태를 개인의 선택으로 인정받고자 하는 이들은 그녀의 용기 있는 결정을 환영하고 지지한다. 편부모 가정이나 비혼모 가정의 아이들도 이번을 계기로 특별하지 않은 정상의 대접을 받게 될 것이라고 바람 섞인 주장도 한다.

나의 개인적인 입장은 전자 쪽에 가깝다. 인간이 창조되고 태어나는 것은 온전히 신의 영역이고 그 범위에까지 인간의 선택과 자유가 허용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단지 내 생각 그리고 지금의 생각이라는 것에 한한다.

난 또 고민할 것이고 또 토론할 것이고 어느 쪽으로든 새로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갈 것이다. 내가 변할 수도 있고 다른 이들이 나로 인해 변할 수도 있지만, 그 방향이 어디든지 우리는 모두 좀 더 나은 삶을 살게 될 쪽을 찾아낼 것이다.

인터넷의 댓글 창을 보니 험악한 욕설과 모욕적 비하의 표현이 오가고 있다. 새롭게 던져진 토론의 주제 안에서 현재의 인간들은 누구도 완벽히 옳거나 그르지 않다.

반대의견은 서로가 가진 생각을 단단하게 하고 깊이 성찰하게 하는 필수 불가결한 것이다. 서로 존중하고 상대의 처지에서 생각해 보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다.

난 어머니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아버지가 설거지를 하는 것을 볼 수 있는 가정에서 살고 있다. 하지만 우리 집도 오래지 않은 과거에 남자들만 제사 지낼 수 있는 그런 집이었다.

오늘 한 일본인의 움직임이 어떤 결과와 변화를 가져올지 모르겠지만 또 머지않은 미래에 우리 모습을 더 좋은 방향으로 만드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더인디고 THEINDIGO]

한빛맹학교 수학 교사, "우리는 모두 다르다"를 주장하는 칼럼리스트이자 강연가이다. 밴드 플라마의 작사가이자 보컬이다. 누구나 불편하지 않은 세상을 꿈꾼다.
승인
알림
6629daacd065d@example.com'

0 Comments
Inline Feedbacks
View all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