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석의 낮은 시선으로부터] 도둑맞은 장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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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휠체어
빈 휠체어/ⓒPixabay

가난마저 도둑질하는 욕망의 정체

이용석 편집위원
이용석 더인디고 편집위원

“그들은 빛나는 학력, 경력만 가지고는 성이 안 차 가난까지 훔쳐다가 그들의 다채로운 삶을 한층 다채롭게 할 에피소드로 삼고 싶어 한다는 건 미처 몰랐다. 나는 우리가 부자한테 모든 것을 빼앗겼을 때에도 느껴보지 못한 깜깜한 절망을 가난을 도둑맞고 나서 비로소 느꼈다.”

나목의 작가 박완서는 1975년도에 발표한 단편소설 <도둑맞은 가난>을 통해 일찌감치 가진 자들이 못 가진 자들의 가난조차 훔치고 있지 않은지 세상을 향해 캐물었다. 가난을 도둑맞다니,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하겠지만, 이미 가난의 경험은 성공한 자를 위한 장식물이 된 지 오래다. 아니 오히려 가난의 경험은 가진 자의 현재를 더욱 돋보이게 하기 위한 없어서는 안 될 서사가 되었다.

가난을 이겨내고 현재의 가진 자가 되기까지의 과정은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고색창연한 성공담이 되고, 가난은 가진 자의 성공을 돋보이게 하는 마침표가 된다. 그래서 가난은 없는 자에게는 당장이라도 벗어나고 싶은 더럽고 거추장스러운 현재지만 있는 자에게는 견장처럼 어깨에 붙이는 욕망이다.

가난은 겪었던 기억이 아니라 바로 지금 당장 겪고 있는 일상이다. 겪고 느끼고 회고하는 가진 자가 성공 이후에 취하는 전리품이 아니라 없는 자의 등을 짓누르는 무거운 짐이다.

장애를 훔치는 도둑들

나는 장애를 극복하라는 얘기를 들으면 뭐, 그럴 수도 있겠다 싶기도 하다. 장애가 극복이라는 낱말의 모호성과 만나 상징하는 것은 기던 자가 걷거나, 앞을 볼 수 없는 자가 광명을 찾는 오병이어의 황당한 기적처럼 명징한 그 무엇이 아니라 오히려 장애를 가난처럼 한때 겪으면 그만인 과정으로 단순화하기 때문이다. 이 단순함은 장애라는 조건을 누구의 것도 아닌, 모든 사람의 것으로 환원시킨다. 가진 자가 겪은 가난이 한때의 회고담이 되듯 누군가에게 장애 극복기는 대단한 무용담이 되기도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무용담은 장애라는 소재를 제법 그럴듯하게 빚은 자신만의 서사가 되겠지만, 욕망이 섞이면 흉기가 된다. 어느 순간 장애가 먹고 사는 방편이 되고 이 방편은 장애라는 조건을 도리어 과장되고 비대하게 부풀린다. 그리고 비대해진 장애라는 조건은 모두의 장애를 좀먹고 도둑질하는 욕망이 되기도 한다. 누군가의 가난을 훔치는 가진 자들의 욕망은 자신을 장식하는 화장이 되지만, 누군가의 장애를 훔치는 도둑질은 오직 자신의 장애를 흉기로 바꿔 휘두르는 욕망이 된다. 그렇게 장애라는 조건은 누군가에게는 가난처럼 구질구질하고 벗어던질 수 없는 남루한 옷에 지나지 않지만, 장애를 훔치는 자들에게는 삶의 방편이 되고 흉기가 된다.

장애를 훔치는 괴물들

가진 자들이 가난을 훔치는 것이 기만이라면 장애라는 조건을 훔치는 자는 자기 부인을 통해 욕망을 키운다. 벌거벗은 임금님처럼 거울 없는 곳에 안주하며 스스로를 돌아보지 못한 채 욕망만을 키우는 괴물. 누군가 대나무 숲에 숨어 들어가 벌거벗은 사실을 이야기할 때까지 장애라는 조건을 훔치는 자의 비둔한 목덜미는 저열한 욕망만을 살찌운다.

의외로 사람은 행복하고 기쁜 경험뿐만 아니라 쓰고 아픈 경험까지 쉽게 버리지 못할 때가 있다. 그래서 가진 자들은 가난을 훔쳐 히든카드처럼 가지고 다녔을 것이다. 그 꼴에 화가 난 소설 속의 화자는 “내 가난이 어떤 가난이라고” 씩씩대기라도 했지만, 장애라는 조건을 자신도 모른 채 도둑맞은 사람들은 “내 장애가 어떤 장애라고” 되알지게 따지지도 못한다. 그렇게 장애라는 조건은 도둑맞은 가난처럼 이미 전리품이 되어 난장에 깔려 거래된 지 오래며, 괴물들을 키우는 먹이가 된다.

장애라는 조건을 훔치는 괴물들의 욕망을 키우며 단물이나 빨던 나는, 장애라는 조건을 도둑맞은 채 텅 빈 대나무 숲에 가뭇없이 숨어든다. [더인디고 THEINDIGO]

오래 전에 소설을 썼습니다. 이제 소설 대신 세상 풍경을 글로 그릴 작정입니다. 사람과 일, 이 연관성 없는 관계를 기꺼이 즐기겠습니다. 그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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