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승준의 다름알기] 이 시대의 영구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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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샷한솔 유튜브 메인 화면 캡처
원샷한솔 유튜브 메인 화면 캡처
안승준 집필위원
안승준 더인디고 집필위원

[더인디고=안승준 집필위원] 내가 어릴 적 TV에서는 똑똑함과는 거리가 많이 먼 캐릭터들이 종종 등장했다. 영구나 맹구 같이 개그프로에도 나왔지만 호섭이나 칠득이처럼 드라마에서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경증 발달장애쯤 되던 그 형들은 여러 가지 면에서 부족해 보이긴 했지만,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난 그들의 특이한 몸짓이나 말투를 흉내 내기는 했지만, 장애를 조롱하거나 인격을 모독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다. 그 형들이 장애인이라는 것도 장애가 무엇인지도 몰랐기 때문에 나에겐 그냥 만나보고 싶은 재미있는 형들이었다.

가끔 어른들이 “바보 흉내 내면 너도 바보 된다”라고 꾸짖었던 기억이 있긴 하지만 그런 말로 내가 설득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오히려 속으로 ‘영구 형은 바보가 아니야’라던가 ‘맹구 아저씨가 얼마나 용감한데!’라면서 팬심을 키워갔다. 신발엔 ‘영구와 땡칠이’ 사인과 캐릭터가 새겨져 있었고 책받침에는 배트맨 흉내를 내는 맹구 사진이 커다랗게 찍혀 있었다.

명절 때 시골에 놀러 가면 TV의 영구 형과 비슷한 동네 형이 있었는데 TV의 캐릭터 덕분인지 난 그 형과 꽤 재미있게 놀던 기억이 있다.

덩치는 어른이지만 놀이의 수준은 딱 우리 또래였던 형과 노는 것은 다른 어른들과는 확연히 다른 재미가 있었다.

형은 보통의 어른들과는 달리 아이들이 하는 놀이에 쉽게 질려 하지 않았지만, 힘은 어른들처럼 세었기 때문에 내가 하지 못하는 것들을 대신해 주기도 했다.

동네 어른들은 지나가면서 형에게 뭐라고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혀를 차기도 했지만 내가 느끼기엔 그 어른들이 형에 대해 정확히 모르고 하는 행동일 뿐이었다.

언젠가의 명절 때부터 시골에 내려가도 그 형이 보이지 않았는데 그때쯤인가부터 TV에서 나오던 그런 캐릭터들도 함께 사라졌던 것 같다.

한참 시간이 지난 후 배우고 연구하면서 알게 된 발달장애인들과 어릴 적 내가 좋아하던 형이 비슷한 스펙트럼에 속한다는 것을 동기화시키기까지는 정말 큰 노력과 시간이 있어야 했다.

장애인에게는 이렇게 대해야 하고 어떤 것은 실례가 되고 어떻게 부르면 인격 모독이고 하는 까다로운 장애감수성들 그리고 지능과 사회성숙도 같은 복잡한 정의로 설명되는 책 속의 발달장애인들은 우리랑 많이 다른 존재이기도 했지만 그런 것들을 다 생각하기엔 어려워서 가까이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냥 우스운 행동을 하면 거리낌 없이 같이 웃고 모르는 게 있으면 물어보고 기분 나빠하면 고치면 되었던 동네 형과 노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사람들이 장애에 대해 어려워하고 장애인을 대하기에 불편해하는 것은 알지 않아도 되는 너무 어려운 설명과 지키지 않아도 되는 특별히 학습된 예의 때문이다.

“형은 진짜 안 보여요?” “언제부터 그랬어요?”라고 거리낌 없이 물어보는 꼬마들의 행동이 온갖 점잔 부리면서 다가오는 어른들의 질문보다 훨씬 편하고 친근하다.

딴생각하며 걸어가다가 턱에 걸려 넘어질 뻔한 나에겐 “잘 좀 보고 다니지!”라고 농담하는 것이 온갖 슬픈 말투로 위로하는 것보다 낫다.

사람들 사이에서 지켜야 할 기본적인 예의라는 것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그런 것들은 꼭 마이크 붙잡고 “장애인식은 이런 겁니다”하고 거창하게 알려주지 않아도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

난 장애라는 것이 동네 형처럼 친근해지기를 바란다. 때로는 개그 소재로 사용되어도 좋다. 안 보여서 모르는 것을 보고 웃을 수도 있고 안 들리는 형을 흉내 낼 수도 있으면 좋겠다. 왜 못 걷는지 왜 안 보이게 되었는지 이야기해도 숙연해지기보다 그냥 “아하! 그렇구나!”라고 알아갔으면 좋겠다.

영구 형이나 맹구 아저씨처럼 그냥 동네에 안 보이는 형도 있고 못 걷는 누나도 있어서 불편하지 않게 서로를 보면서 웃을 수 있으면 좋겠다. 장애가 재미난 캐릭터도 되고 일상의 언어도 되기를 바란다.

요즘 제자 녀석이 시각장애인의 일상을 유쾌하게 풀어내는 유튜브로 큰 인기를 누리고 있다. 안 보이는 것도, 안 보여서 물건을 잘 못 고르는 것도, 지팡이를 짚고 길을 찾는 것도 ‘원샷한솔’은 웃으면서 소개한다.

문득 그가 이 시대의 영구 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항상 밝은 그를 보고 아직 많은 사람이 시각장애인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까지 하는 듯하다.

책에서 배운 대로 시각장애를 알고 있는 다수는 그럴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렇지만 많은 장애인은 실제로 그렇게 재미나게 살고 있다.

유튜브를 보고 자라는 많은 아이가 지나가다 만나는 많은 시각장애인과 동네 형 관계를 맺어가길 바란다. [더인디고 THEINDIGO]

한빛맹학교 수학 교사, "우리는 모두 다르다"를 주장하는 칼럼리스트이자 강연가이다. 밴드 플라마의 작사가이자 보컬이다. 누구나 불편하지 않은 세상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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