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송합니다. 사망여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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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합니다_사진
ⓒ픽사베이(Pixabay)
  • 윤은호의 ‘왜 자폐당사자는 죄송해야 할까?’ 첫 번째 이야기
  • 자폐당사자는 사회적 소통 방식 자체가 장애의 핵심 요소

[더인디고 = 윤은호 집필위원] 사망여우는 유튜브 채널이다. 최근 특정 크라우드 펀딩 사이트의 잘 못이나 대형 유튜버들의 책임지지 않는 태도를 지적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래서일까? 사망여우는 “죄송합니다. 사망여웁니다.”라는 멘트로 유트브 방송을 시작한다.

윤은호 더인디고 집필위원

이 말은 ‘사망여우’씨의 정체성을 잘 나타낸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대화를 거는 것이 자신의 팬들이 아닌 사람들에게는 분명히 죄송한 일일 것이고, 그래서 자신이 그들에게 개입하는 것 자체를 두려워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말을 곰곰이 생각하다가, 나도 다른 사람들에게 말을 걸거나, 내 의도를 전달하기 직전에 의도적으로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거는 대화가 다른 사람들에게 의도치 않은 거부감을 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말을 자주 쓰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평소의 나의 사회적 소통 방식도 무한한 거절감과 거부감을 애초부터 예상하고 이뤄지는 것은 아닐지 생각해 보았다.

자폐 특성이 기반을 두는 신경다양성(neurodiversity)은 한국사회가 요구하는 ‘눈치’, 또는 ‘유행’을 포함한 사회적 맥락에 대한 습득과는 무관하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화두, 키워드에 집중한다. 그 키워드와 관련된 정보나 자료들을 일상 속에서 습득해 나가면서 사회와의 소통 방식을 구축해 나가는 상당히 독특한 특성이다. 그래서 자폐당사자들은 세상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고, 다른 식으로 주변과 소통한다. 그리고 그 소통방식은 대한민국이라는 고맥락(high-contextual) 사회에서는 더 큰 장벽이 된다.

내가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자주 쓰게 된 계기 또한 과거에 소통의 어려움을 너무나 친숙하게 겪어왔기 때문이다. 청소년 때 PC통신에 이어 이후 시간이 지나 인터넷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하게 되었다. 인터넷 검색을 하면서 과거에는 알지 못했던 다양한 취미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겁도 없이 그런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은 온-오프라인 공간에서 채팅을 하면서 친해지고 싶은 사람들을 찾고자 힘썼다. 다행히 문이 열려 있는 분야에 들어가는 데 성공하여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면서 내 소통능력도 기를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가 언제나 친밀함으로 이어지지만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많은 사람이 연락을 끊었고, 나도 사람들에게 상처를 끼치기도 하고, 동시에 상처를 입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이 수백 명 정도 발생하다 보니, 다른 사람들과 소통을 시작하려는 시도를 이제는 하기가 힘들어졌다.

한국 사회에서 어떤 사람이 사회적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기 위해 필요한 기술을 배우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한국 사회의 상황과 문화, 자신의 위치 등 일반인은 쉽게 습득하기 쉽지만, 자폐당사자들은 습득하기 힘들고 또한 ‘왜 이걸 배워야 하지’ 싶은 것들이 있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을 바탕으로 내 감정과 행동을 숙이고, 표현하지 않는 방법도 배워야 한다. 그것을 배우고 따라하는 데 성공했을 때, 자폐 당사자들은 ‘자폐를 극복했다’고 칭해지고, 그들의 활동은 ‘사회적 성공’으로 불려진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당사자들이 자폐를 극복하는 동안, 자폐당사자의 일상의 삶 속에서는 서비스 업무에서만 이뤄질 것 같은 감정노동(emotional labor)이 매일 일어나고 있다. 그러한 감정노동을 잘 수행하면 장애를 극복한 것이 되고, 그런 노동을 할 능력이 없다면 ‘도전적 행동’을 반복하는 사회 부적응자가 되어 버린다.

자폐당사자는 그래서 사회적 소통 방식 자체가 장애의 핵심 요소다.


예를 들어서 내가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서 아무렇게나 대화하고 내 의견을 계속해서 적극적으로, 사회적 눈치를 보지 않고 표현하면 어떻게 될까? 아마 주변 사람과의 소통이 단절될 것이다. 가족도, 주변의 동료도, 회사 사람도 점차 나를 멀리할 것이고, 그럼 괜찮은 일자리(decent work)나 높은 삶의 질을 누리는 것 또한 어려워질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폐당사자는 마음을 열고 나누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러한 감정을 나누기 시작하는 순간, 다른 사람들로부터 쉽게 비난받을 것이라는 점을 몸으로 체득해 왔기 때문이다.

최근 자폐 특성 관련 여부로 인터넷에서 논란이 되어 온 펭수는 그런 점에서 자폐당사자와 다르다. 펭수는 자신의 중심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을 대하는 방식, 즉 ‘눈치’를 챙기게 만드는 사회적 활동을 기획해서 발산하고, 사람들은 그 분위기를 읽고 거기에 맞춰주는 행동을 쉽게 하곤 한다. 펭수는 주변 인물에게 고맥락적 활동을 요구한다. 물론 펭수의 활동 자체는 자폐당사자와 비슷해 펭수가 신경다양성을 갖춘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펭수와 자폐당사자가 만나면 동일한 소통을 할 수 있을까? 자폐당사자의 대화 방식에 펭수는 매우 불편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펭수가 보여주는 도전적인 행동에 자폐당사자들은 곧바로 놀라서 도망칠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 같은 사람들이 펭수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불편한 마음이 떠오르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그래서 자폐당사자의 삶은 생각보다 고달프다. ‘자폐성 장애인’이 사회적 소통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을 만큼 다른 사람들이 볼 때 뛰어난 성과를 냈다는 기사가 올라가면 단기간의 박수와 갈채가 쏟아진다. 그러나 그런 능력을 갖추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사회는 대안이 없는 온정주의적 보도를 포함해 차별적인 시선을 보이거나 혐오하기도 하고, 아예 장애라는 공론장에서 쉽게 제거해버리기도 한다. 이러한 벽을 인지 능력의 정도와 무관하게 날마다 느끼는 사람들이 자폐당사자들이다.

이런 자폐당사자의 삶의 방식을 다른 장애인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이러한 이해에 대한 어려움을 더욱 가중시킨 것이 지난 2014년 5월 제정된 발달장애인법이다. 발달장애인법은 전혀 다른 특성과 사회적 어려움을 가진 지적장애와 자폐장애를 하나의 장애 분류로 엮음으로서 자폐당사자들을 저인지 중심의 집단에 두었고, 그 결과 고인지 자폐당사자들과 수많은 미등록 자폐당사자들은 같은 손상이 있음에도 장애정책의 대상에서 지속적으로 밀려나고 있다. 현재의 당사자주의나 주변 관계자들 사이의 관계로 장애인 정책 논의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지만 정작 그 담론 속에는 자폐당사자들의 의견이 한 번도 제대로 포함되어 온 적이 없다.

자폐당사자의 삶이 현재의 장애 담론에서 다뤄지지 않고 있다는 앞으로의 주장은 일상뿐만이 아닌 다른 영역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바로 장애학 담론을 포함한 학계다. [더인디고 The Indigo]

[인하대학교 문화콘텐츠문화경영학과 초빙교수] 한국의 첫 자폐 연구자이자 지식생산자로서의 일자리를 만드는 것이 목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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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rcis50@naver.com'
바람꽃하늘소망
4 years ago

저도 죄송하다는 말은 많이 했던 것 같아요..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Admin
조성민
4 years ago

감사합니다. 예의와 배려의 상식 속에서의 죄송, 미안합니다는 어쩌면 당연한 것이지만 윤교수님의 글을 통해 또 다른 ‘죄송합니다’를 이해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