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석의 낮은 시선으로부터] 새해, 감염병 창궐 시대를 사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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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2020년과 마스크
ⓒunsplash

[더인디고=이용석 편집위원]

낯선 세상

이용석 편집위원
이용석 더인디고 편집위원

살면서 한 번도 겪지 못했을 세상을 우리는 지금, 살고 있다. 이 느닷없는 상황은 지리멸렬하고 끝 간데없는 아수라로 돌변해 한 해 내내 우리를 위협했다. 정체 모를 위협은 실체가 모호하며 여전히 소문으로만 전해져 막연하지만, 매일 아침 그 피해가 숫자로 노골적으로 드러난다는 점에서 실제적 공포다. 눈을 뜨자마자 감염병 확진자의 수를 확인하는 일은 이제 습관이 되었고, 그나마 지인들과 오붓하게 즐기던 점심도 주변 눈치를 살피며 허겁지겁 허기를 달래는 요식행위가 되었다. 이 황당한 상황이 새해가 온다 한들 눈에 띄게 나아질 사정이 아니어서 심란하지만, 뭐, 또 그런대로 우리는 각자 결정한 일상의 방식대로 살아내고 있다.

숨거나 숨기거나

잔뜩 움츠린 일상 속에서도 세상은 어김없이 자전하고 공전했다. 장애계는 당사자들의 국회 진출을 계기로 장애 관련 법률들의 개정을 시도했고, 꽤 그럴듯한 결과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특히 만 65세 이상 활동지원서비스 계속 지원 법 개정은 고령 장애인의 삶이 ‘돌봄’이 아닌 일상에 남아 있도록 하는 것이며, 탈시설지원법 발의는 그동안 장애운동의 주장으로만 여겨왔던 탈시설의 법적 근거를 비로소 구체적으로 제시했다는 점에 주목한다. 이런 유의미한 결과들은 그동안 장애계에서 요구하고 주장했던 의견들이 수렴된 결과이기는 하지만, 정말 그럴까? 이미 한 축은 전달 체계 안에 스스로 가둬두고 있어 이해관계가 노골적으로 선명하다. 또 한 축도 이제 안으로 들어오려는 속내를 굳이 감추지 않는다. 전달 체계는 구성원들의 밥벌이가 되고 밥벌이는 당연한 듯 이해관계로 환원된다. 이 두 명분은 서로를 상호보완하면서 덩치를 키워 기득권에 충성하고 복무한다. 물론 이런 일이야 어디에나 존재하며 또 어쩌면 이런 조건들이 세상을 바꿔야 한다는 새로운 목소리들의 구체적인 명분이 될지도 모르겠다. 문제는 그 안에 ‘우리’ 혹은 ‘나’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채 헛된 주장과 논리를 명분 삼아 기득권에 들러붙어 기생하는 ‘우리’ 혹은 ‘나’는 때때로 숨거나 숨기거나 하면서 스스로 위장한다. 누가 더 나쁜 놈들일까?

세상의 그릇에 나를 담기

20년 전 우리는 세기말의 징후를 경험한 적이 있다. 그러니까 1999년 12월 31일에서 2000년 1월 1일로 넘어갈 때 컴퓨터가 날짜나 시각을 다루는 과정에서 오류를 일으켜 모든 시스템이 셧다운 될지도 모른다는 암울한 공포는 보기 좋게 빗나갔다. 소위 Y2K라 불렸던 컴퓨터 오류 대란은 당시 산업이나 경제 등에 치명적인 문제를 일으킬 것이라는 우려가 팽배했지만, 그저 한 비디오 가게에서 반납 연체료 800원이 더 붙는 오류가 났었다는 허랑한 소문만 떠돌았을 뿐 세상은 건재했다. 팬데믹 이후에도 세상은 건재할 것이라는 ‘희망’은 결코 달라지지 않을 세상에 대한 ‘절망’의 다른 표현이다.

다시, 새해를 맞이했다. 지난해를 되돌아보기에는 새해 첫날이어서 민망하지만 한마디로 ‘졌다’. 삶이 승부여야 할 이유는 없지만, 그럼에도 졌다. 온전히 세상의 그릇에 ‘우리’ 혹은 ‘나’를 담는 일에 보기 좋게 실패했다. 공부도 더뎠고, 실천도 미진했으며 주장도 부황하고 공허했다. 어쩌자고 이렇듯 지지부진했을까? 고민도 깊어지면 대책 없는 징징거림이 될 테지만 어쩌겠는가, 일 년에 하루쯤 징징대며 세상의 그릇에 나를 담는 시늉이라도 해야 내일을 살아낼 자신감이 남아 있지 않을까. 이 글을 모든 분, 오늘 하루쯤 징징대며 내일을 살아낼 궁리라도 하시라. 그리고 부디, 살아남으시라.

[더인디고 THEINDIGO]

오래 전에 소설을 썼습니다. 이제 소설 대신 세상 풍경을 글로 그릴 작정입니다. 사람과 일, 이 연관성 없는 관계를 기꺼이 즐기겠습니다. 그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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