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승준의 다름알기] 이웃의 수도를 함께 녹여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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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이 녹고 있다
ⓒPixabay
안승준 집필위원
안승준 더인디고 집필위원

[더인디고= 안승준 집필위원] 학교 건물들은 방학을 이용해서 여러 가지 공사를 한꺼번에 진행하는 경우가 많다. 매일매일 수업이 진행되는 학기 중에는 통행에 지장을 주거나 소음이 발생하는 큰 작업을 할 수 없어서 한여름과 한겨울은 자연스럽게 공사 시즌이 된다.

매일 출근하는 학교이지만 그런 이유로 인해 방학 중에 출근할 때에는 혹시 위험한 것이 없는지 조심조심 살피고 또 살펴야 한다.

어제는 마침 진행되던 계단공사 때문에 잘 다니지 않던 길로 돌아서 엘리베이터를 이용했다. 가방을 내려놓고 컴퓨터를 켜고 있는데 친하게 지내는 당직 선생님이 순찰을 하시다가 내 사무실로 들어오셨다. 그리고 그 순간 교내 방송이 울렸다.

“지금부터 엘리베이터를 점검합니다. 교내에 계신 선생님들께서는 별도의 방송이 나가기 전에 승강기 사용을 중지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평소에도 이따금씩 나오던 방송이라 무심코 흘려듣고 넘기려는데 당직 선생님은 갑자기 깜짝 놀라며 당황스러워하셨다.

사무실이 5층이라 교무실까지 내려가려면 조금 에너지가 들긴 하겠지만 저렇게까지 놀랄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려는 순간, 계단이 공사 중이라는 사실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선생님께 오늘 부여된 임무 중 가장 큰 것은 교무실을 지키는 것이고 지금 선생님이 교무실로 갈 방법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공사 중인 두 군데 계단, 방학 중이라 잠가 놓은 경사로, 점검을 막 시작한 엘리베이터 어떤 것도 해결책을 줄 수 없었다.

당직 선생님을 더욱 난감하게 만든 것은 이 사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전교에 딱 한 사람, 본인뿐이라는 사실이다. 옆에 있던 나조차도 내 문제가 아니라는 이유로 같은 고민을 하지 못했다.

여기저기 전화를 돌리고 이런저런 도움을 청하고 나서야 선생님은 임시로 개방이 허용된 경사로를 이용해 무사히 근무지로 복귀할 수 있었다. 해피엔딩으로 끝난 갑작스러운 상황을 보면서 대학생 때의 동아리가 생각났다.

장애학생의 학내 권익을 위해 모인 우리 동아리는 장애 유형과 정도가 다양했다. 지팡이 들고 다니는 시각장애인도 있었고, 휠체어 타는 친구도 있었다. 수어를 사용하는 선배도 있었지만 모든 음식을 잘게 썰어야만 먹을 수 있는 후배도 있었다.

각자가 가진 불편함이 달랐기에 우리는 모이고자 했던 목적도 그만큼 달랐고 첫 모임부터 삐걱거릴 수밖에 없었다. 엘리베이터나 경사로의 설치가 시급하다는 주장은 점자교재나 수어통역을 원하던 학생들에겐 우선순위가 될 수 없었다.

계단밖에 없는 오래된 강의실 건물은 전동휠체어를 이용하는 중증지체 학생들에겐 당직 선생님의 당황스러움과 비교도 안 될 만큼 커다란 문제였겠지만 다른 동아리 회원들의 입장은 아무렇지도 않게 엘리베이터 점검방송을 듣던 나머지 교사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당장 아무 교재도 볼 수 없는 나의 처지도 교수님의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 없는 청각장애인 친구의 사정도 무엇보다 다급했지만 당사자를 제외한 이들에겐 그 정도의 공감을 끌어내지 못했다. 적어도 그건 당장의 내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구성원에게 동등한 학습 기회 보장, 약자에게 편안한 학교 등 대의명분은 동의할 수 있었지만, 서로의 입장에 온전히 공감하고 연대하기엔 우리는 많이 어렸고 덜 성숙했다. 친구의 어려움은 대략 알겠지만 내가 그 입장이 될 필요성까지는 느끼지 못했다.

엘리베이터가 있는 식당을 찾아다니고 점자 메뉴판을 만들고 자막이 입혀진 한국 영화를 어렵사리 구해 보면서 우리는 조금씩 불편함을 공유하고 모두에게 더 나은 학교를 만들어 가는 쪽으로 힘을 모았지만, 서로의 약함에 공감하고 같은 입장에서 고민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억지로 이해해야 했고 의지로 공감력을 올려야 했다. 어쩌면 대학을 졸업하던 시간까지도 혹은 지금, 이 순간도 난 나와 다른 어려움을 겪는 이들의 입장을 헤아리고 함께 하는 것에 많이 부족할지 모른다.

잘못된 점자표기나 점자블록 위의 장애물에는 반사적으로 흥분하지만, 지하철 역사의 고장 난 엘리베이터나 자막 없는 드라마들을 보고도 대부분 상황에서 난 즉시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할 때가 많다.

그렇지만 다른 이의 소수성과 약자성이 가지는 불편함에 나부터 문제의식을 느끼고 해결하려는 입장을 가질 때 나의 상황들도 나아진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다.

시각장애라는 소수로 겪게 되는 문제를 마주할 때 어려운 것 중 하나는 내가 느끼는 불편함을 내 입장처럼 바라보고 함께하는 이들이 그다지 많지 않다는 점이다.

베스트셀러 도서를 다른 이들과 같은 시간에 서점에서 구매해서 읽고 싶지만, 출판사들 입장에서 내게 그런 것을 해 주는 것은 특별한 배려이거나 유별난 요구일 때가 많다. 그것은 출판사와 관련된 사람들이 나와 같은 입장을 이해해 줄 때 비로소 해결될 수 있다.

버스 번호판에서 소리가 나게 하거나 지하철 화장실에서 음성안내가 나오는 것도 다수의 사람에겐 소음이므로 꺼 두어도 상관없는 것일 수 있다. 그런 것도 이웃의 동의가 없다면 언제까지나 문제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내겐 너무도 절실한 것이고 같은 입장인 이들이 많지 않기에 더 해결되지 않는 아픈 부분이다.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겪는 많은 문제도 다수나 전체의 문제라기보다는 일시적 소수에게 한하는 것들이기에 어려운 경우가 많다. 물난리나 가뭄 같은 천재지변도 가족이나 작은 집단이 가지는 아픔도 그렇다. 그렇기에 우리는 내 아픔과 불편함이 아니더라도 함께 고민해야만 한다.

대학교에 엘리베이터를 만들고 경사로를 설치하는 일에 누구 보다 앞장서서 힘을 모았을 때 나에겐 점자교재가 생겼다. 다른 이를 위해 움직여야 그들도 나를 위해 움직인다.

추운 겨울 오토바이를 위태롭게 운전하는 라이더들에게 식은 음식을 불평하는 이웃을 보았다. 최강한파로 얼어버린 수도 때문에 영업하지 못하는 식당 앞에서 투덜대는 아저씨도 보았다.

배달환경이 좋지 않을 때 식은 음식을 불평하는 것에 앞서 그들의 처우가 더 나아지기를 함께 고민해야 한다. 이웃의 얼어버린 수도를 함께 녹일 때 우리의 문제들도 그렇게 녹아내린다. 우리가 어렵사리 내민 손과 마음은 결국 우리가 혼자라 느낄 때 우리에게 돌아온다.

주변의 어려움을 보았다면 우리가 함께 움직여야 한다. 그것은 결국 나를 위하는 길이다.

[더인디고 THEINDIGO]

한빛맹학교 수학 교사, "우리는 모두 다르다"를 주장하는 칼럼리스트이자 강연가이다. 밴드 플라마의 작사가이자 보컬이다. 누구나 불편하지 않은 세상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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