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석의 세상풍경] 극복하는 삶, 그 신기루 같은 허망한 풍경 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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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사베이
  • 내 삶의 위치에서 보이는 열 가지 풍경, 둘
이용석 더인디고 편집위원

장면 하나.

달포 전이었나, 우연히 TV에서 예사롭지 않은 장면을 보게 됐다. 예전 ‘돈 크라이(Don’t Cry)’라는 노래를 불렀던 가수였으나 사고로 인해 사지마비 장애를 갖게 된 사람이 전동 휠체어를 탄 채 노래를 부르는 모습이었다. 그가 부른 노래는 음이 높기로 유명한 곡이어서 어지간한 가수들도 원키로 부르지 못하는 곡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는 휠체어에 앉아, 그것도 폐활량을 늘려주는 보조기기를 이용해서 그 어렵다는 곡을 어렵지 않게 불렀다. 사람들은 환호했고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이 감격스런 장면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카메라는 관객들이 감동의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일일이 보여주었다. 노래를 부른 본인 또한 매우 만족스러운 듯 두 뺨에 엷은 홍조를 띠며 감격해 했다.

이튿날 언론들은 ‘사지마비 장애를 극복하고 열창했다’는 기사들을 쏟아냈다. 나 역시 그의 노래에 감동했다.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는 중증의 장애를 갖고 있으면서도 깊은 성량과 깔끔한 음성으로 노래를 마쳤으니 그 만족스러움이 오죽했을까? 그의 표정에 어린 만족감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그의 열띤 표정은 장애를 극복했다는 만족감이었을까?

장면 둘.

4월 총선을 앞두고 여당은 휠체어 이용 장애여성을 인재영입 1호로 발표했다. 그는 ‘장애를 딛고 일어선 무용수 출신으로 지금은 재활학 박사’로 소개되었다. 말하자면 발레리나를 꿈꾸다 장애를 갖게 되었으나 장애를 극복하고 대학교수가 되었다는 거다. 이 경우 좀 더 적극적으로 ‘장애극복’은 ①발단, ②전개, ③위기, ④극복이라는 신파적인 이야기로 각색되고 진화함으로써 누구나 들으면 감동하게 되는 주요한 소재로 쓰인다. 즉 장애는 극복되지 않으면 안 되는 삶의 걸림돌로 구체적으로 해석되며, 그래서 ‘장애극복’은 그가 한 정당의 인재영입 1호가 되는 대표적인 이유가 된다.

결국 장애는 극복해야 하는 ‘비정상성’을 의미하게 되고 극복을 통해 ‘정상성’에 가까워지는 것이 ‘장애극복’의 목적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럴 수 있다고 치자. 장애인라면 누구나 하나쯤 가슴에 품고 있는 장애 적응기의 고생담이 좀 과장되게 각색되어 감동의 이야깃거리로 대중들에게 소비된다고 한들 뭐 그리 대수일까. 애잔하고 통속적이기까지 한 장애 적응기의 고생담을 자기소개서에 과장되게 표현했다고 해서 결코 나무랄 일도 아니다. 어차피 그 곤혹스러운 고생담은 겪은 자의 몫이어서 어려움 또한 오롯하게 그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굳이 구구절절 지적하는 이유는 단 하나다. 명예스러운 자리에 오른 장애인의 삶이 고작 ‘장애극복’이라는 과장되고, 또 가능하지도 않은 조건을 통해서만 소비되는 이 구질구질하고 진부한 방식에 대한 불만 때문이다.

장애인에게 장애극복은 신기루와 같은 허상이며 신화다.

그러면서도 간절한 희망이고 헛된 꿈이기도 하다. 허상이고 신화여서 사람들은 ‘장애극복’ 이야기에 쉽게 환호하고 감동하고 공감의 눈물을 흘리지만, 당사자에게는 이뤄질 수 없는 희망이고 꿈이어서 잔인한 감동일 수밖에 없다. 장애를 가진 사람에게 장애를 극복한다는 것은 ‘할 수 없음’에서 ‘할 수 있음’으로의 물리적 확장이어야 하며, ‘가능하지 않은 것’에서 ‘가능한 것’으로의 전복이어야 하기 때문에 잔인하다.

이 두 가지 ‘장애극복’의 조건들은 단순히 육상선수가 자신의 육체적인 능력의 한계를 넘어 단 1초의 기록을 깨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으며, 무일푼의 빈털터리가 번듯한 사업체의 주인이 되는 것과도 사뭇 다르다. 이를테면 걸을 수 없는 사람에게 계단을 오르게 하는 것, 말하지 못하는 자에게 노래를 부르게 하고, 볼 수 없는 자가 그림을 그리게 하는 진부하고 잔혹한 극복의 미담은 그래서 비의적(悲意的)이고 주술적(呪術的)이다. 장애극복은 한 사람의 고통스런 삶의 한 부분이 겪은 자가 ‘주체’가 되어 해석되는 것이 아니라 대중들에게 장애라는 불행은 오직 타인의 몫이라는 안도감을 주는 ‘대상’이 되어 소비됨으로써 비의적이며, 또한 ‘할 수 없음’에서 ‘할 수 있음’으로, ‘가능하지 않은 것’에서 ‘가능한 것’으로 환원토록 기대하고 간구하고 감동함으로써 다분히 주술적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장애극복은 ‘자유’를 통해 극복될 수 있다. 모든 사람들에게 ‘자유’는 자연적이고 실제 이미 주어져 있는 것으로 간주되기 쉽다. 하지만 자유는 외부적으로 방해 조건들이 없을 때 비로소 충분조건이 된다. 한 예로 계단 아래에 있는 휠체어 이용 장애인의 장애극복은 휠체어에서 갑자기 일어나 계단을 오르는 기적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계단이라는 자신의 자유를 가로막는 조건을 불평등으로 인식하는 것에서 비롯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단지 장애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부정되고 있는 수많은 자유들이 실은 모든 사람들에게는 당연히 향유되고 있는 기본적 자유임을 인식하는 것은 단순히 물리적 불편함을 경험하는 것과는 다른 일상의 전복을 꾀하는 일이기도 하기에 진정한 장애극복의 시작점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장애를 갖게 된 후 처음으로 자신의 노래를 다시 열창한 가수의 모습이 예사롭지 않았던 이유는 그가 장애를 극복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폐활량을 늘려주는 보조기기를 통해서라도 그렇게 열망하던 노래를 다시 부를 수 있는 ‘자유’를 만끽하고 있다는 그 희열에 찬 표정 때문이었다. 부디 그의 장애극복이 노래라는 ‘자유’를 통해 이뤄지기를 바란다.

[더인디고 The Indi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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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rcis50@naver.com'
바람꽃하늘소망
4 years ago

좋은 글 감사합니다

jhpark331@hanmail.net'
박주환
4 years ago

잘 읽었습니다.
자유롭지 않은 인권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명예가 필요하더라도 극복을 거래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바랍니다

khist@hanmail.net'
khi
4 years ago

세상에서 장애인의 현실은 녹록지 않습니다. 직장에서나 심지어 일부 장애인가정에서도 말이죠. 비장애인이 대다수고 등록된 장애인들은 5% 정도 되는 이 한국사회에서 장애인들이 설 곳은 극히 드뭅니다. 언론이나 드라마, 각종 매체들은 이미 옐로 저널리즘이 된 지, 오래된 상태라 ‘장애’란 주제는 정당의 프로파간다나 기득권의 마케팅을 위한 적절한 수단이 되버렸고, 사회에 있는 대다수의 장애인들은 비장애인들의 입맛에 맞추기 위해 바둥바둥 대고 있지요. 바뀌어야 할것은 매우 많습니다. 가장 기본적인 장애인을 위한 법률조차도 비장애인의 시각에서 말고, 장애인들이 사회생활을 하며, 실질적으로 개선되고 체감할 수 있는 수준의 법개정과 강력한 집행력이 필요합니다. 또한, 이를 위해서는 장애인 당사자들도 주눅들지 말고, 본인이 가진 장애를 온전하게 받아들이도록 노력하고 권리주장에 있어서도 당당할 필요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