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미영의 오늘] 내 삶의 장학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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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마음을 나누다
ⓒunsplash

[더인디고=조미영 집필위원] 

“갑자기 일이 생겼네, 너 혼자 다녀와야겠다.”

교무부장 선생님이 담임선생님과 동행하라고 했는데 급한 일이 있다며 선생님은 먼저 퇴근했다. 중3이지만 학교와 집 외의 장소를 잘 다니지 않아 지리에 어두운 나는 불안했다. 잘 찾아갈 수 있을까? 혼자 걱정하며 저녁 6시까지 학교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냈다.

조미영 집필위원
조미영 더인디고 집필위원

‘L 클럽’이라는 단체에서 해마다 중3 학생들의 고교 진학에 도움 되라고 장학금을 준다고 했다. 유난히 나를 챙기던 담임이 나를 추천했다고 그걸 받으러 부두 근처의 건물을 찾아가야 했다.

버스를 타고 생전 처음 가보는 중앙동에 내렸다. 부두 근처의 건물까지 행인에게 길을 물어 겨우 찾아간 곳의 넓은 강당은 사람들로 붐볐다. 남자들은 양복 차림이라 그냥 그랬지만 여자들의 한복 차림은 우아했다. 저고리 끝동에 그려진 잔잔한 꽃무늬들은 흰색 바탕과 잘 어울려 그림 같았다. 폭넓은 치마의 짙은 파란색은 바람 한 점 없는 바다를 연상케 했다.

분명 이들이 사는 세상은 내가 사는 세상과 다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항상 후줄근한 차림의 엄마와 언제나 작업복만 입는 아버지가 생각났다. 옷이 날개라지만 내 부모님도 저리 차려입으면 저들과 같은 분위기가 날까 잠시 생각에 잠겼다.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젊은 여성이 내게 다가왔다. 명단을 확인한다며 서류를 꺼내 들고는 몇 번이나 본 곳을 또 보더니,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어느 학교 이름이 뭐라고?”

한 번 더 묻더니 결국 내 이름이 없다고 했다.

“느그 학교 선생님이 탈락자 명단을 잘못 보셨는갑다, 우짜노…”

안쓰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여성은 자신이 더 미안해했다. 기운이 빠졌다. 한쪽에서는 나처럼 교복 차림의 학생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옆에는 하얀 모자를 쓴 요리사들이 뷔페 음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는 걸 참으며 밖으로 나왔다.

허탈한 마음으로 도로변을 걸었다. 장학금을 못 받은 것보다 나와 다른 세상에서 사는 사람들의 행복한 모습이 자꾸 떠올랐다. 나도 그런 삶을 살고 싶었다. 그 단체에 대해 알아보니 사회봉사 단체였다. 봉사활동을 하려면 우선 내 삶이 어느 정도 평탄해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그들처럼 장학금을 주려면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있어야만 가능해 보였다.

한동안 그 단체를 생각하면서 봉사를 머릿속에 심어뒀다. 흰색저고리와 파란색 치마를 입은 한복 차림의 여성을 보면 그때 그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봉사활동의 각오는 슬그머니 사라지고 그들이 사는 세상에 대한 동경만 남았다.

고등학교 시절 성당 교우들과 고아원(보육원) 방문 몇 번 한 것을 끝으로 청춘을 즐기느라 바빴던 젊은 시절이 그냥 그렇게 흘러가 버렸다.

결혼 후 아들의 장애로 인해 내 문제에만 집착하던 힘든 시절도 시간이 지나니 그런대로 자리를 잡았다. 내 개인의 문제가 아닌 우리 문제에 대해 접어뒀던 봉사활동 생각이 나를 다시금 흔들었다.

교사가 꿈이었던 내게 학교에서 자원봉사 교육을 할 수 있는 강사의 기회가 왔다. 중고등학교 학생들의 의무 봉사 시간이 연 20시간이라 그것을 학교에서 봉사 교육으로 일부 시간을 대체해 주는 학교가 많았다. 함께 활동하는 선생님들과 열심히 준비해서 시연하고 떨리는 마음으로 학생들과 대면할 때는 행복했다. 교과목 수업이 중요하지만, 자원봉사 기본정신을 가르치고 나도 배우면서 인성 교육에 함께 한다는 자부심이 컸다. 자원봉사에 대해 많은 걸 알았다며 강사인 나를 칭찬하는 학생들의 교육 후기는 덤으로 얻는 행복이었다. 그 행복으로 나는 이미 나의 꿈을 이룬 중년이었다.

기관과 봉사자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학교는 거마비 지원조차 예산이 안 되는 등 여러 가지 사정으로 활동을 접게 되어 아쉬웠다.

아들이 장애인이니 장애운동 쪽을 멀리할 수는 없었다. 집회에 나가서 구호를 외치고 장애 해방가를 따라 불렀다. 가사에 집중하면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반 토막 몸뚱이로 살아간다고 친구여 이 세상에 기죽지 마라,

삐뚤어져 한쪽으로 사느니 반쪽이라도 올곧게…”

장애 운동판에 서서히 스며들었다. 학령기를 마치고 갈 곳 없는 성인 장애인들의 의미 있는 낮 활동을 위해 노숙 농성을 하고 삭발을 감행하며 투쟁의 대열에 나섰다. 복지제도는 저절로 생겨나는 게 하나도 없었다. 장애 당사자와 그 부모들이 움직인 만큼 조금씩 변화하며 만들어졌다.

내 일이 미뤄지고 우리 일로 바쁘다 보니 할 만큼 했다는 변명이 나를 유혹했다. 더 젊은 엄마들이 움직여 주길 바라며 길진 않았지만, 가열찬 몇 해를 보내고 뒤로 나앉았다.

외면하려 했지만 여기저기서 여전히 투쟁은 계속되고 있었다. 약자들이 외치다 지쳐 생을 마감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건들이 줄을 이었다. 몸은 편했지만 마음은 불편했다. 어느새 나의 발걸음은 성인 장애인 직업훈련센터 설립을 반대하는 동네 주민과 대치 상태에 있는 농성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억울함을 호소하고 정당한 권리를 요구하는 집회나 기자회견에 참석하여 마음을 보탰다. 함께하지 못하는 곳은 적은 금액이지만 후원으로 대신했고 그 결과 지금은 활동보다 후원이 더 늘어났다.

몸으로 마음으로 약소하나마 움직였던 나의 모든 활동을 봉사라 말하고 싶다. 나만의 이익을 위한 게 아니라 우리를 위한 공익의 활동이었다고 평가하고 싶다.

성인이 되고 시작한 나의 활동은 10대 때 보았던 아름다운 사람들의 봉사를 기억하며 따라 한 것이었다. 비록 장학금은 놓쳤지만, 봉사 현장을 보았고 그것이 내 삶의 평생 장학금이 되어 준 것이다.

작은 바람이 있다면 나의 행동을 누군가도 배우고 따라 해 줬으면 좋겠다. 그런 사람이 많아질 때 우리 사회가 보다 바람직한 방향으로 변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나는 앞으로도 작으나마 행동으로 힘을 보탤 것이고 눈에 띄는 곳에 소액 후원을 하며 나만의 선행과 봉사활동을 이어나갈 것이다.

[더인디고 THEINDIGO]

가족과 함께 하는 일상에서 행복을 찾습니다. 그 행복을 나누면서 따뜻한 사회를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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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mina@naver.com'
famina
3 years ago

편하게 읽히면서 그속에 뜻은 진중하네요 함께할수 있어서 행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