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폐를 말하다] 자폐학술지가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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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폐학술지 커버 ⓒhome.liebertpub.com/publications/autism-in-adulthood
  • 윤은호의 ‘왜 자폐당사자는 죄송해야 할까?’ 두 번째 이야기
  • 여러분은 자폐 장애인을 어떻게 부르십니까?
윤은호 더인디고 집필위원

[더인디고 = 윤은호 집필위원] 지난 해 창간된 해외 학술지 중에 《성인기 자폐(Autism in Adulthood: ISSN 2573-9581)》가 있다. 이 학술지의 창립은 학계 차원에서도 다소 놀라운 점이 많은데, 지금까지 자폐를 주제로 나온 학술지 중에서, 자폐당사자성 관점이 크게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성인기 자폐》의 홈페이지에 있는 <목적과 시선(Aims & Scope)>란에서부터 그러한 의도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 참고. https://home.liebertpub.com/publications/autism-in-adulthood/646

홈페이지를 들여다보면 자폐당사자인 도라 레이메이커 박사(Dora Raymaker, PhD)가 편집부장으로 일하고 있고, 이 학술지의 편집위원회의 25명의 편집위원 중 9명이 자폐당사자이다. 이들 중 박사 자폐당사자는 5명에 달한다. 이미 해외에서 자폐연구자 인력풀이 상당히 형성되어 있다는 증거이다. 또한 편집위원 중에는 논란은 있지만 자폐계 이론화에 큰 역할을 해 온 사이먼 배론코언(Simon Baron-cohen)도 포함됐다. 그만큼 자폐당사자계와 자폐계 전반이 이 학술지의 전반에 참여하고 있다는 점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더 재미있는 점은 이 학술지의 투고 가이드라인이다. 투고 가이드라인의 맨 앞부분은 ‘언어사용’과 관련되어 있는데, 국내 장애계에서도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들이 많다. 한국의 자폐와 관련된 기존의 상식들과 이 학술지의 가이드라인을 비교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 그 중 일부를 번역해 봤다.

  1. 《성인기 자폐》는 자폐와 관련해 ‘사람-우선적(people-first) 용어(예를 들어 자폐를 가진 사람<people with autism>)’와 ‘정체성-우선적(identity-first) 용어(예를 들어 ‘자폐’ 특성적 사람<autistic person>’의 사용에 있어서 양쪽의 강력한 주장과 열정이 있다는 점을 존중한다. 하지만 자폐 개인(autistic individuals) 가운데는 ‘피플퍼스트’ 용어 사용이 늘어남에 따라 오히려 낙인을 찍는 다는 점에서 이러한 단어를 싫어한다는 과학적 문헌이나 커뮤니티 문헌도 많다. 따라서 정체성 우선적 언어를 사용하거나, ‘자폐 스펙트럼을 가진 사람’(person on the autism spectrum)과 같은 더 중립적 용어를 사용할 것을 권고한다.
  2. 카너 자폐 또는 경증이나 중증 자폐와 같은 불명확한 단어는 가급적 사용하지 말 것을 권고한다.
  3. 자폐성 장애’(ASD)라는 단어는 자폐 진단을 논의할 때 사용될 수 있다. 그 경우가 아니라면 ‘자폐’, ‘자폐 스펙트럼’, ‘자폐 성인’, ‘자폐 참가자’라는 언어를 사용할 것을 권고한다. 역사적인 데이터를 언급할 때, 아스퍼거 증후군 등과 같은 역사적인 진단명이 사용될 수 있지만, 이러한 단어들은 당연히 뒤떨어진(out of date)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

가이드라인이 몇 개 더 있기만 한데, 이 정도만 읽어도 기존의 한국 자폐 인식과는 전혀 동떨어진 모습들을 많이 볼 수 있다.

다시 한 번 내용을 정리해보자. 우선 이 학술지는 우리에게 생소한 정체성-우선 단어를 쓸 것을 권고한다. 미국에서는 그동안 장애운동가를 중심으로 사람-우선적 용어를 쓰는 성향이 짙어 왔다. 즉 People을 먼저 쓰고 그 다음에 해당 당사자가 가지고 있는 특성(with ASD, with intellectual disabilities, with physical disabilities 등)을 나열하는 쓰기 방식이 대두되어 왔다. 하지만 미국의 자폐인권운동에 참여하는 당사자들은 자폐 특성을 인간에게서 분리할 수 없는 것이라는 이유로, 그러한 주장을 부정한다.

실제로 신경다양성은 장애계에서는 핫한 이슈가 아니지만, 자폐계에서는 그 개념에 대한 당사자들의 주장과 관계자들의 주장이 부딪히는 등 상당히 긴 시간동안 계속되어 온 논쟁 주제 중 하나이다. 또한 한때 자폐당사자들은 자폐 특성이 장애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주장까지 했었다. 최근 자폐자조네트워크(ASAN)이 성명서를 통해 자폐가 장애에 해당한다는 것을 확인하며 논란이 꽤 수그러들기는 했지만, 그들 또한 자신을 규정하는 ‘장애’개념에 대해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분명히 언급해 둘 필요가 있겠다.

둘째, 이 학술지는 그동안 한국 학계뿐만이 아니라 보호자들이나 당사자들도 쉽게 써 왔던 ‘고기능 자폐’, ‘저기능 자폐’라는 단어를 아예 투고자의 입에도 올리지 않을 것을 요구한다. 해외에서는 자폐 특성이 장애라기보다 개인이 가지고 있는 특성이라는 관점이 강해서, 자폐 특성 전체를 여러 개로 나눌 수 없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이러한 결과가 적극적으로 반영된 것이 미국정신의학회에서 내는 정신장애 진단 편람(diagnostic and statistical manual of mental disorders) 5판인 DSM-5에서 모든 자폐를 하나로 통합한 것이다. 그리고 국내에서 번역된 자폐 관련 서적 중 꽤 중요한 책인 《뉴로트라이브》는 다른 누구의 주장이 아니라, 자폐자조네트워크(ASAN) 활동가들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DSM-5에서 자폐가 통합되고, ‘아스퍼거 증후군’이 삭제되었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이 사실을 알고 나서야, 나는 이 변화가 당사자들의 권리를 삭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서 이뤄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이 과정에서 사회소통장애(social communication disorders)를 포함한 ‘미등록 당사자’ 문제는 나중에 이야기하도록 하자).

셋째, 그래서 해외의 주요 자폐 사용자들은 아스퍼거라는 단어의 사용 자체를 지양한다. 아스퍼거를 ‘역사’로 분명히 못박고 있을 정도로 말이다. 물론 2000년대 초반의 자폐운동 초기에는 자신이 아스퍼거임을 지향하는 사람들의 운동이 좀 더 많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들은 자폐 운동으로 통합되었고, 지금은 몇몇 온라인 채널을 제외하고는 자신이 자폐 사용자임을 수용하며 받아들이고 있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여전히 고인지 자폐당사자들이 자신을 ‘아스퍼거’로 생각하고, 자신을 자폐당사자라고 부르는 것을 매우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다(이 문제 또한 나중에 언급하게 될 것이다). 물론 보호자들부터 당사자들을 ‘아스’로 부르고 있는 것 또한 개선되어야 할 사실이다.

하나의 사례를 가지고 ‘저게 저 학술지에서만 발생하는 게 아냐?’라고 질문하실 분들이 있을 것 같아 다시 한 번 강조하자면, 이게 해외 자폐당사자들의 기본 입장이 맞다. 해외에서는 자폐당사자들이 자신들이 고민해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표현할 방안을 찾아냈고, 연구자가 되어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그에 비해 한국에서는 자폐(自閉: ‘스스로 닫힘’)라는 이름조차 자폐당사자들을 낮추거나 비하하기 위해 이름 붙여져 있고, 대다수의 자폐당사자들은 자신들의 정체성과 가능성을 탐색하기보다, 자신을 비하하며 한국사회에 자신을 맞추기 위해 사회성을 높여야 한다고 부르짖는다. 그 결과 한국에서 자폐당사자들은 사회에 적응하거나 진출할 기회 자체를 잃어버리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가 사실은 현재의 한국 내 장애 담론, 심지어 장애학(장애연구)에서까지 반복되고 있다는 점이 앞으로 살펴볼 문제의 핵심이다. [더인디고 The Indigo]

[인하대학교 문화콘텐츠문화경영학과 초빙교수] 한국의 첫 자폐 연구자이자 지식생산자로서의 일자리를 만드는 것이 목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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