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⓸] #같이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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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참여연대

‘상생’이라는 사회적 화두가 다시 던져졌다. 위기 때면 나타나는 이 화두는 이젠 우리에게 익숙하다. ‘같이 살자’는 것이니 어려운 시기에 이 단어만큼 와 닿는 말도 없으리라. 그런데 이 말은 들을 때마다 목구멍에 박힌 가시처럼 불편해지는 건 왜 일까.

사실 상생이라는 말은 비교적 대등한 관계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해관계를 따질 때 어울리는 말이다. 예컨대 ‘한 발씩 양보’하여 서로 만족하는 결과를 만들어가는 과정 혹은 최근의 코로나19 사태와 같이 모두의 위기에서 서로 도와 함께 사는 길을 찾아가는 성숙한 시민들이 바로 상생의 모습이다.

반면에 상생이 정치적 구호로 등장하고, 하나의 프레임으로 강요되는 순간 이 말은 더 이상 아름답지도 낭만적이지도 않다. 우리는 지난 역사에서 상생을 가장한 정치프레임의 허구를 보아왔다. 국민들에게 상생의 결과로 던져진 찐빵 속에는 팥소가 들어있지 않았다. 일방통행식 희생의 강요였다. ‘고통분담’이 아니라 ‘고통전담’이었다.

문재인정부의 상생은 조금 다를까. 몇 가지 장면을 보자.
지난 3월 6일 대통령자문기구인 경제사회노동위원회는 “‘상생과 협력’의 정신을 바탕으로 코로나19 위기를 극복하자는 데 공감하고 한발씩 양보해서 뜻을 모았다.”며 ‘노사정 선언’을 불쑥 발표했다. 지금과 같은 비상한 시국에 노사정이 모여 머리를 맞대고 해법을 찾아가려는 모습은 당연하고 필요하다. 그런데 이게 좀 훅 치고 들어온 느낌이다.

경사노위는 사회적 합의기구다. 법적 구속력이 없다. 지켜도 그만 안 지켜도 그만이라는 얘기다. 반면에 잘만 작동되면 법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도 있는 테이블이다. 때문에 사회적 합의기구는 무엇보다도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중요하다. 그런데 제1노총이 빠져있는 모양새도 그렇고, 사회적 합의를 위해 공을 들인 흔적보다는 뭔가 쫓기는 초조함만 보인다. 게다가 ‘노사정선언’이 아무 때나 수시로 막 해도 되는 무게가 아니지 않은가.

선언의 내용도 이렇다 할 게 없다. 유일한 민생 관련 내용은 “고용안정 및 취약계층 대상 지원 강화와 관련해서 노사는 인원 조정 대신 고용을 유지할 수 있도록 근로시간 단축 및 휴직 등의 조치를 적극적으로 실시하기로 했다.”는 부분이다. 또 이를 위해 “정부는 고용유지지원금, 생활안정자금 융자, 체당금(국가에서 사업주를 대신해 밀린 임금을 지급해주는) 제도 지원 확대 또는 요건 완화 등 지원을 강화”한다는 것이다.

상생을 찾아보기 어렵다. 오히려 임금손실, 실직 등 일방적 희생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농후한 근로시간단축, 휴직을 벌써부터 멋대로 기정사실화 해놓았다. 대책이란 것도 그렇다. 이게 정부가 마땅히 해야 할 복지정책, 고용안정정책이다. 국민이 낸 세금으로 국민 삶의 최저선을 지지하는 국가의 행정을 상생이라고 부를 것인가. 만약에 그렇다손 치려면 적어도 노사정이라는 거창한 이름까지 빌릴 일은 아니다.

‘착한 임대인 운동’은 어떤가. 임대료를 인하했다는 임대인 얘기를 처음 접했을 때는 그저 훈훈한 미담이었다. 그런데 정부와 정치권은 여기에 ‘상생’이라는 프레임을 입혔다. 정부는 임대인에게 임대료 인하분의 50%에 해당하는 세금감면 혜택 등을 주기로 했고, 이틈에 어느 국회의원은 인하한 임대료의 67%를 세금공제해주는 법안까지 발의했다. 마치 코미디 같다.

영세 소상공인을 도우려면 직접 지원하면 될 일이다. 당사자인 영세상공인연합회도 기자회견을 열어 직접 지원을 촉구한다. 임대인들의 호응도 별로 없다. 조삼모사도 아니고 기껏 인하한 임대료를 국민세금으로 임대인에게 되돌려 줄 건 또 뭔가. 처음 선의로 마음을 낸 임대인 입장에서는 앞으로 주고 뒤로 받는 모양이 심히 민망할 노릇이다.

상가임대차 문제는 좁은 땅덩어리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대한민국에서 큰 화근이 된 지 오래다. 더욱이 ‘조물주 위에 건물주’의 존재감을 자랑하는 임대인과 영세 임차인 사이에서 일시적인 임대료 인하를 놓고 상생을 얘기한다는 것은 낯간지럽다.

문재인정부의 성공을 바라는 사람들에게는 “잘 해주었으면…” “이전 정권과는 뭔가 다르겠지…” 하는 기대가 있다. 이러한 기대는 선택의 여지도 별로 없는 우리나라 정치현실에서 국민들의 노심초사이기도 하다.

그래서 문재인정부가 잘 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묻는다. 문재인정부가 현재 말하고 있는 ‘상생’에는 진정성이 있는가. 온전한 상생의 내용이 있는가. 심성을 자극하는 감성정치가 민초들의 치열한 삶의 현장을 대신할 수 있는가. 혹여 문재인정부의 ‘상생’에는 ‘그들만의 민주’ ‘자신만의 정의’와 같은 혹세무민은 없는가. 여전히 시민들을 캠페인의 대상, 정치적 동원대상 정도로 여기는 과거의 구태를 반복하고 있지는 않은가.

‘상생’의 본질을 다시 생각한다. 상생은 무작정 ‘서로 한 발씩 양보’가 아니다. 벼랑을 등진 사람하고 벼랑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 사이에서 서로 한 발씩 양보하자고 하면 그것을 상생이라고 할 것인가.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상생을 얘기하려면 양쪽이 아니라 어느 한쪽의 기울기에 주목해야 한다.

정부 탓을 늘어놓다보니 좀 허탈하다. 기껏 소모적인 논쟁에 하나를 더했나 싶은 생각에서다. 정부와 정치권에 대한 비판과 요구는 하나의 통로일 뿐이다. 요구가 실현되려면 힘이 실려야 한다. 힘을 실으려면 대세를 가르는 큰 흐름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흐름을 만들어가는 연대의 주체는 우리들 자신이다.

시민사회진영에서는 우리사회를 흔히 80 대 20의 사회, 99%와 1% 사회라고 부른다. 그렇지만 절대다수로 묶여있는 사람들의 내부는 복잡하다. 그 안에는 우리가 세심하게 들여다봐야 할 스스로 만들어낸 많은 차별과 장벽들이 있다.

코로나19 사태는 역설적으로 우리가 상생해야만 하는 이유를 가르쳐준다. 내친김에 우리가 어떻게 상생할 수 있을 것인지 지혜를 모아보는 온라인 행동을 조직해보는 것은 어떨까.
#같이 살자. [더인디고 The Indigo]

hlsanha@daum.net'
더 인디고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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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22b8be55164@exampl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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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nh631@daum.net'
김낙하
4 years ago

코로나19로 마비된
현실 난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