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승준의 다름알기] 먼저 걷는 이의 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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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ixabay
  • 빠르게 변하는 문명 덕분에 여전히 최초인 것이 많다
안승준 더인디고 집필위원

[더인디고=안승준 집필위원] 인류는 처음부터 사회를 이루고 살지는 않았다. 씨족으로 연결된 작은 공동체 정도는 있었지만 그것이 공동의 이익과 아픔을 공유하는 사회가 되기까지는 꽤나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는 시간들이 필요했다. 그러면서 하나보다는 둘, 둘보다는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돕고 사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으로 이어진 큰 요인 중 하나는 정보 공유와 관련한 것이다.

가장 먼저 인간이라는 존재는 어느 곳으로 가야 먹을 것이 있는지, 어떤 동물이 위험한지, 무엇을 먹고 또 어떤 것은 먹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수십 갈래의 길이 있어도 그 모든 길을 경험한 이후에야 작은 정보라도 얻을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먼저라는 이유로 다치기도 하고 위험에 빠지기도 하고 죽기도 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그 이후에 태어난 사람들도 같은 과정을 무한히 반복했다는 것이다. 문자도 통신수단도 없긴 했지만 무엇보다 그러한 정보를 공유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렇지만 다행인 것은 인간에게는 높은 수준의 지능이 있었고 정보 공유가 인류 전체의 생존에 미치는 긍정적 영향을 늦지 않은 시간에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먼저 걸어간 이들은 그 길을 걷게 될 다른 이들에게, 새로운 것을 경험한 사람들은 또 다른 이들에게 정보를 나누었고 그것들은 점차 방대한 자료가 되어갔다. 자료의 양이 많아지면서 문자가 만들어지고 종이도 발명되었다. 그러면서 인간은 더 이상 호랑이와 맨손으로는 싸우지 않았고 배가 고파도 독버섯 따위를 먹지 않았다. 인간은 모든 동물 중에서 가장 숫자가 많은 종이 되었고 다른 생명체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문명도 가지게 되었다.

난 다른 사람들과 조금 다른 길을 걷는 삶을 살고 있다.
눈으로 보면 되는 것을 손으로 만져봐야 알 수 있고, 또 남들은 안 만져도 되는 더러운 것이나 위험한 것을 경험해야 할 때도 있다. 넓은 대로에서 길을 잃기도 한다. 꼬마들도 읽을 수 있는 수 많은 정보조차도 보지 못함으로 인해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이 많다. 많은 것들은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그것이 가능한 것인지 아닌지조차 모른다. 듣기 좋은 말로 선구자이지만 조금만 다르게 생각하면 원시인류와 다를 것이 별로 없다.
운이 좋게도 수학교사를 하고 있지만 그것은 나의 선택들이 아주 작은 확률들의 연속으로 긍정적 결과를 향했기 때문이지 조금이라도 빗나갔다면 난 그냥 독버섯 먹고 쓰러진 어느 선조와 같은 평가를 받았을 것이다.

정말 다행인 것은 난 인류 최초의 시각장애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난 오래전에 만들어진 점자를 배웠고 혼자 지팡이를 짚고 걷는 것도 어렵지 않게 훈련했다. 훌륭한 선배들의 성공스토리를 들으며 시행착오를 줄였고 로맨티스트 형들의 결혼담을 들으며 연애도 해 봤다. 지금의 내가 존재하는 것은 무엇보다 먼저 나와 같은 길을 걸은 선배들의 덕이 가장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시각장애인들이 완벽히 같은 길을 걷는 것은 아니다.

나의 시간들은 빠르게 변하는 문명 덕분에 여전히 최초인 것이 많다. 그리고 호랑이를 피하고 독버섯을 뿌리 뽑는 일처럼 간단한 일이 아닌 경우도 많다. 내가 글을 쓰고 노래하고 강연하는 이유는 바로 이 지점에서 의무가 되고 책임이 된다. 난 먼저 걷는 이의 의무감으로 나와 비슷한 길을 걸을 이들에게 나의 이야기를 전한다. 나의 방법이 모두 최선은 아닐지 몰라도 다른 이들에겐 오류의 경우의 수를 줄여준다. 가능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내 기준 안에서 분류하고 함께 고쳐갈 것을 제안하기도 한다.

얼마 전 생일에 아주 감동적인 선물을 받았다. 오랫동안 나의 활동을 보아왔다는 익명의 편지에는 내가 하는 일에 과분한 의미를 담는 단어로 채워져 있었다. 나의 기분을 좋게 하기 위해 조금은 과장된 표현을 썼을 거라 생각하지만, 조금 양보해도 앞으로 내가 조금 더 활동해도 되겠다는 생각을 다지기엔 충분했다.

난 아직도 하고 싶은 것이 많은 욕심쟁이이다. 2020년 대한민국의 장애인에게 많은 것이 최초일 것이고 그러기에 또 다른 실패가 따라올 것이다. 운 좋게 성공한다면 좋겠지만 실패의 경험이라도 뒤에 오는 이들을 위해 열심히 기록할 것이다. 이것이 먼저 걷는 이의 최소한의 의무이기 때문이다.

인류의 현대문명이 가능했던 것은 먼저 걷는 이들이 의무를 충실히 이행했기 때문이다. 다수 아닌 소수로 살아가는 많은 이들의 삶이 나아질 수 있는 방법 또한 그 의무에 동참하는 것이다. 먼저 걷는 이들의 모든 길을 응원한다. [더인디고 The Indigo]

한빛맹학교 수학 교사, "우리는 모두 다르다"를 주장하는 칼럼리스트이자 강연가이다. 밴드 플라마의 작사가이자 보컬이다. 누구나 불편하지 않은 세상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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