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미경의 컬처토크] 다시 ‘그녀에게’

ⓒ 유튜브화면캡처/https://www.youtube.com/watch?v=8UTJQxY2ADA

사진_차미경
차미경 더인디고 편집위원

[더인디고=차미경 편집위원]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영화 ‘그녀에게(Talk To Her, 2002)’는 아주 오래전 보았던 영화다.

마치 의식이 천상의 어디쯤을 향해 있는 듯 그윽한 표정을 하고 누워 있던 알리샤의 너무도 매혹적인 옆모습에 끌려 선택했던 영화였다. 그런데 최근 한 영화 프로그램에서 배우 김영민이 이 영화를 ‘숨어 보는 명작’으로 꼽으면서 그만의 감성으로 영화 이야기를 들려주던 것이 인상 깊어서 문득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에서 일명 귀때기로 출연했던 코믹한 잔상이 아직 남아 있어서 진지한 그의 모습이 좀 낯설어 보이기도 했지만 사뭇 진지하면서도 들뜬 표정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 이야기를 하는 그의 소년 같은 모습에 마치 처음 듣는 영화 이야기처럼 나도 모르게 집중이 됐다. 이 영화를 다시 보면 또 어떤 느낌으로 보게 될까?…그래서 다시 찾아보게 된 영화, ‘그녀에게’.

그들은 정말 사랑했을까.

우연히 창밖으로 내려다뵈는 발레학원을 엿보다 첫눈에 알리샤를 사랑하게 된 베니뇨.
알리샤에 대한 그의 짝사랑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혼자서 속으로만 짝사랑을 키우다가 알리샤가 빗길에 교통사고로 코마 상태에 빠지자 그녀의 곁에 있기 위해 베니뇨는 그녀를 전담하는 간호사가 된다.

알리샤에 대한 베니뇨의 돌봄은 이미 오랫동안 아픈 어머니를 돌본 경험에서 얻어진 노련함에 더해 섬세하고 헌신적이기까지 하다. 코마 상태로 죽은 듯이 누워 있는 알리샤지만 그녀 곁에 있는 4년 동안의 시간을 그는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고 말한다.

한편 또 다른 커플, 리디아와 마르코.
이혼한 아내와의 상처로 늘 그늘져 있던 마르코는 여자 투우사인 리디아를 취재하러 갔다가 떠난 사랑에 아파하는 그녀와 서로의 상처를 나누며 사랑에 빠지게 된다.

리디아와의 만남을 통해 마르코는 비로소 상처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지만 투우경기 도중 예기치 않은 사고로 리디아는 코마 상태의 식물인간이 되어 버리고 만다. 알리샤와 충분한 교감을 나누는 베니뇨와 달리 마르코는 리디아와 아무런 교감도 느낄 수 없어 괴로워하다가 결국은 그녀의 곁을 떠나게 된다.

베니뇨의 지극한 사랑과 돌봄, 그리고 헌신은 과연 사랑일까. 베니뇨는 알리샤를 지극히 사랑하고 보살폈지만 정작 누워 있는 알리샤는 그의 존재를 모른다. 그리고 베니뇨의 일방적인 사랑에 대해 그녀는 사랑이라고 동의한 적이 없다. 또 그녀가 깨어나더라도 그것을 사랑이라고 여기게 될지 예측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알리샤는 코마 상태 이전에도 베니뇨를 알지 못하는 그저 모르는 사이일 뿐이기 때문이다.

베니뇨는 그녀를 혼자서 오래 사랑해 왔지만 알리샤에겐 그저 길에서 우연히 지갑을 주워준 어떤 한 남자일 뿐이다. 어쩌면 샤워 후 복도에서 베니뇨와 마주친 당황스런 기억 때문에 그를 오히려 불쾌한 남자로 기억할지도 모른다. 그런 그녀를 베니뇨는 일방적으로 사랑했고 그 때문에 알리샤는 임신하게 된다. 결국 베니뇨는 강간 혐의로 수감되고 알리샤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알지 못한 채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만다.

아무리 아름다운 사랑일지라도 아무리 지극한 헌신일지라도 그것이 일방적인 것일 때 우리는 그것을 사랑이라 말하지 않는다.

마르코는 어떤가. 리디아에게서 아무것도 느낄 수 없어 괴롭다던 그는 사실 리디아가 건강하게 살아 있을 때에도 리디아와 진정으로 교감한 적이 없다. 자기 기분에만 빠져서 자신의 이야기에만 급급하던 마르코는 결국 리디아가 그에게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듣지 못한 채 그렇게 그녀를 잃고 만다. 마르코가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었던 이유는 리디아가 코마 상태에 빠진 상황 때문이 아니라 그 역시 상대에게 귀 기울이지 않은 일방적인 태도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니 서로 사랑한다는 말은 얼마나 어렵고도 아름다운 말인가.

장애를 대하는 두 가지 태도

베니뇨와 마르코에게서 내가 새삼 다시금 보게 된 것은 ‘장애’를 대하는 그들의 서로 다른 태도다.
베니뇨에게 알리샤는 비록 의식 없이 누워 있는 상태지만 전과 다름없이 여전히 똑같은 알리샤로 받아들여진다. 마치 그녀가 그의 말을 다 듣고 보고 느끼는 것처럼 그녀를 대하고 그녀가 불편하지 않도록 모든 정성을 다한다. 식물인간이 아니라 그저 옆에서 잠든 연인처럼 그녀의 모든 것을 사랑스러워하고 존재만으로 기뻐하고, 있는 그대로의 그녀를 사랑할 수 있는 현재를 누린다.

그러나 마르코는 전과 다른 리디아의 모든 것이 낯설고 힘들다. 마르코에게 리디아는 그저 감각 없이 아무것도 인지하지 못하고 교감할 수 없는 코마 상태의 환자일 뿐이다. 자신에게 깊은 위안을 주었던 사랑했던 리디아는 이제 없고 그 앞에 있는 것은 사랑할 수도 느낄 수도 없는 시체처럼 무감각한 존재일 뿐이다. 그래서 고통스럽고 슬프고 매순간이 절망스럽다.

베니뇨와 마르코의 서로 다른 태도를 사랑의 방식이 아닌 장애를 대하는 서로 다른 수용 태도로 바라보면 또 다른 느낌의 영화가 된다.

Moore(1998)는 직업재활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성인 장애인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가족의 정서적 지지가 장애수용에 유의미한 영향을 미치는 요인임을 밝힌 바 있다. 또 Hahn(1988)은 지금까지 장애에 대한 적응의 개념을 개인의 내적 과정으로만 인식한 탓에 장애에 대한 사회적 반응까지 고려하지 못하였다며 기능적 제한성과 더불어 사회적 태도도 모두 고려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다시 말해 장애의 수용은 손상 그 자체보다는 가족이나 사회의 반응 등과 같은 환경에 대한 개별적인 경험에 의해서 더 많은 영향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연인의 코마 상태, 즉 장애를 대하는 베니뇨와 마르코의 태도를 비교할 때, 위에 인용한 학자들의 주장을 적용해 보면 누가 더 건강하고 긍정적으로 자신의 장애를 수용하게 될까.

베니뇨처럼 장애 여부를 떠나 있는 그대로의 존재 그 자체를 인정해 주고 필요한 것들을 세심히 살피며 함께 있는 모든 순간을 행복하게 곁에 있어 주는 이,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기뻐해 주는 이… 이런 사람들 곁에 있다면 기능적 제한이나 손상으로 겪는 힘겨움을 조금 더 여유롭게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장애 수용 관점에서 베니뇨와 마르코를 다시 바라보았다.

꼭 장애가 아니더라도 인생에서 불현듯 맞닥뜨리게 되는 예기치 않은 상황에 대해서도 우리는 베니뇨나 혹은 마르코의 태도로 직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럴 때 나는 베니뇨가 될까, 마르코가 될까… 사랑에 관해서도 삶에 대한 어떤 태도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정의 내리지 않은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은 마지막에 다시 만나는 마르코와 알리샤의 이야기를 여운처럼 남기며 관객에게 던지는 물음표로 결말을 맺었다. 그 질문들에 대한 답은 관객이 각자의 시각으로 찾게 될 것이다.

질문하는 영화가 좀 지루할 수 있지만 이 영화는 때때로 발견하는 덤 때문에 지루할 틈이 없다는 것이 큰 장점이겠다. 이 영화에 직접 출연하기도 한 세계적인 무용가 피나 바우쉬의 ‘마주르카 포고(Masurca Fogo)’는 엔딩의 한 장면으로, 그리고 그녀의 ‘까페 뮐러’는 첫 장면으로 쓰이며 영화의 질감을 더한다. 또 브라질의 국민 가수 ‘카에타노 벨로조(Caetano Veloso)’가 직접 ‘쿠쿠루쿠쿠 팔로마(Cucurucucu Paloma)’를 부르는 장면 등 눈과 귀가 즐거운 호사를 영화 보는 동안 누릴 수 있으니 다시 ‘그녀에게’를 볼만하지 아니한가. [더인디고 The Indigo]

라디오 방송과 칼럼을 쓰고 인권 강의를 하면서 나름의 목소리로 세상에 말을 걸어왔습니다. ‘easy like Sunday morning...’ 이 노래 가사처럼 기왕이면 일요일 아침처럼 편안하게 문화를 통한 장애 이야기로 말을 걸어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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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on7935@daum.net'
유금순
2 months ago

흥미로운 해석이네요 한 번 봐야겠습니다 ‘그녀에게’라는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