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승준의 다름알기] 오늘의 고민에 감사해야 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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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간이 너무 실하면 비가 상하고 비가 너무 실하면 신이 다친다
  • 오늘의 결핍은 어제의 채워짐에 대한 보상
안승준 더인디고 집필위원

[더인디고=안승준 집필위원]  한의학의 한 분야인 오행침법에 대해 공부하던 때의 일이다. 스스로의 임상경험에 대해 자주 말씀해 주시던 선생님께서 치료를 잘 하게 되면 자주 일어나는 일이라며 한 가지 일화를 말씀해 주셨다.

“왼쪽 팔을 움직일 수도 없을 만큼 아픈 환자가 왔어요. 진단을 하고 다행히 원인이 금방 발견되어 침 한 번에 완치가 되었지요. 머리가 땅에 닿을 만큼 감사하다며 인사하고 돌아갔던 환자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좋지 않은 표정으로 다시 찾아왔어요. 왼팔을 낫게 해 준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 병을 오른쪽으로 옮겨 놓은 것 같다면서요.”

처음에 들을 때는 그게 무슨 이야기인가 정말 사기라도 친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조금만 생각해 보면 병을 치료하는 것보다 병의 위치를 바꾸는 것이 훨씬 어려운 일이라는 건 누구라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상처를 치료하는 의사는 있지만 얼굴에 난 흉터를 다리로 옮겨주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위험한 부위에 생긴 암을 정교한 수술로 절제하는 기술은 들어봤어도 덜 위험한 부위로 옮긴다는 말은 들어본 적도 상상해 본적도 없다. 그렇다면 그 환자는 어떻게 된 것일까? 한의학에는 양의학에서 할 수 없는 병의 이동이 가능하기라도 한 것일까?

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그 분의 오른팔에는 원래부터 병이 있었다. 다만 더 크게 병들어 있던 왼팔 덕분에 그동안 통증을 느끼지 못하고 지냈을 뿐이다. 가장 아팠던 부위가 완벽하게 치료되면서 비로소 다른 부분의 병도 자각하게 된 것이다. 의사선생님의 말을 반신반의하며 듣던 환자는 오른팔까지 낫게 된 후에야 상황을 정확히 이해하고 며칠 뒤엔 허리를, 또 며칠 후엔 다른 쪽 다리를 치료받으면서 그제야 진심을 담아 선생님께 존경을 표했다고 한다.

난 항상 커다란 고민들을 안고 살아왔다. 처음 실명을 했을 때는 보이지 않는 눈으로 어떻게 살아갈지를 고민했고, 점자라는 쉽지 않은 도구로 입시를 준비할 때나 한없이 부족해 보이는 내 처지로 처음 연애에 도전할 때도 그랬다.

지금도 말할 수 없는 문제들로 끙끙대며 살아가지만 그것들은 나의 이전 과제들이 해결되었기 때문에 누릴 수 있는 새로운 도전이라고 생각한다. 실명이라는 사건에 대해 인정하거나 적응하지 못했다면 공부를 잘 하고 대학을 가려는 생각은 해 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조금 더 많은 돈을 벌고 안정적인 직장을 얻기 위해 고민한 것은 대학생활의 수많은 고민들이 해결되었기 때문에 누릴 수 있었던 축복이기도 했다. 오늘 내 앞에 놓여있는 관문은 열리지 않을 것 같던 어제의 문을 열었기 때문임을 진심을 담아 고백한다.

오행에서 말하는 완벽함은 어느 한쪽이 특별히 강한 상태를 말하지 않는다. 오장육부가 정확히 균형을 이룬 상태를 최적의 건강한 상태라고 말한다. 간이 너무 실하면 비를 상하게 되고 비가 너무 실하면 신이 다치게 된다. 완전한 상태를 모두들 바라지만 인간의 몸이 그렇게 되는 것은 내가 보기엔 불가능에 가깝다. 어딘가를 치료하면 또 어딘가가 아프고 한쪽이 나아지면 다른 쪽은 부족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양의학에서 말하는 항상성이라는 것도 어쩌면 이와 매우 비슷하겠다. 사람의 삶도 오행의 원리를 닮았다고 생각한다. 한두 가지만 해결되면 남부러울 것 없이 행복할 것 같지만 그것은 이상적인 바람일 뿐이다. 돈이 많은 사람도 행복한 가정을 가진 사람도 명예와 권력을 가진 사람도 끊임없는 한 구석의 결핍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오늘의 결핍에 감사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 또한 어제의 채워짐에 대한 보상이기 때문이다.

게임을 하다가 5 레벨쯤 달성하면 이전 레벨의 성과는 모두 잊고 현재의 레벨 업에 대한 생각만 하게 된다. 그러나 1~4 레벨을 겪어내지 못했다면 5 레벨의 고민은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 5 레벨에서의 상태가 완벽한 마지막이라면 우리는 더 이상 게임을 할 목적을 잃고 게임을 종료해야만 한다.

우리가 사는 것도 그렇다. 지금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은 감사한 어제가 있었기 때문이고 우리 앞에 또 다른 과제가 놓여있다는 것은 아직 삶을 살아가야 할 존재의 이유가 남아있다는 뜻이다. [더인디고 The Indigo]

한빛맹학교 수학 교사, "우리는 모두 다르다"를 주장하는 칼럼리스트이자 강연가이다. 밴드 플라마의 작사가이자 보컬이다. 누구나 불편하지 않은 세상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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