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석의 세상풍경] 차별을 드러낸 시간 8분 46초, 그 잔인한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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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화면캡처/https://www.youtube.com/watch?v=wHfOKY_LKSs
  • 내 삶의 위치에서 보이는 열 가지 풍경, 여덟

[더인디고=이용석 편집위원]

한 장의 사진.

이용석 더인디고 편집위원

경찰 정복을 입은 데릭쇼빈이 위조지폐범으로 몰린 조지 플로이드의 목을 무릎으로 짓누르고 있는 사진을 처음 보았을 때 그저 범죄자를 제압하는 경찰의 모습으로만 보였다. 선글라스를 이마에 얹은 데릭쇼빈은 자신이 행사하는 공권력의 정당성을 시위라도 하듯 자신만만한 눈빛을 두릿거렸다. 반면 경찰의 무릎에 목덜미를 제압당한 조지 플로이드는 아스팔트 바닥에 얼굴을 짓눌린 채 경찰에게 제압당한 범죄자의 초라한 모습이었다.

아니다. 또 다른 프리즘을 통해 사진을 다시 읽자.
백인 경찰이 흑인 사내의 목을 무릎으로 짓누르고 있는 사진을 처음 보았을 때 그저 흑인 범죄자를 제압하는 백인 경찰의 모습으로만 보였다. 선글라스를 이마에 얹은 백인 경찰은 자신이 행사하는 물리력을 시위라도 하듯 자신만만한 시선으로 정면을 쏘아보았다. 반면 얼굴을 아스팔트 바닥에 짓눌린 흑인 사내의 모습은 처연하고 애처로워 보였다.

한 장의 사진 안에 담긴 상황에서 두 사람의 이름을 인종의 특징으로 대체하자 전혀 다른 풍경이 목격된다. 단순히 범죄자를 제압하는 경찰의 모습에서 공격하는 백인과 공격당하는 흑인이라는, 인종의 차이로 구분하는 순간 소름끼치도록 극명한 차별과 억압의 기제가 읽힌다.

“숨을 쉴 수가 없어요(Please, I can’t breathe).”라는 흑인 조지 플로이드의 절박한 간청에도, 주변 사람들의 만류에도 백인 경찰 데릭쇼빈은 그의 목을 짓누른 무릎을 거두지 않았다. 그리고 조지 플로이드는 숨을 거두었다. 사람이 사람의 무릎에 짓눌린 채 죽어가는 시간은 고작 8분 46초였다.

저를 죽이지 마세요, 숨을 쉴 수가 없어요

흑인인 조지 플로이드가 백인인 데릭쇼빈에 의해 무참히 살해당하는 데 걸린 시각은 8분 46초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죽음은 수백 년 전부터 시작되었다. 누구나 조지 플로이드가 될 수 있다는 섬뜩한 각성은 경계와 불안으로 각인되어 차별을 스스로 내면화하고 있는 것이다. 처음에 이 사건은 미국의 언론에서조차 단신으로 처리되었던 일상적이고 진부한 일이었다. 그저 수없이 벌어졌던 흑인의 억울한 죽음 중 하나 정도였을 테니까. 미국에서 조지 플로이드는 늘 존재해 왔다.

2014년 흑인 남성 에릭 가너는 조지 플로이드처럼 경찰의 목 누르기로 질식사했다. 열두 살 흑인 소년 타미 라이스는 비비탄 총을 가지고 놀다 경찰의 총격으로 사망했다. 그리고 로드니 킹, 오스카 그랜트, 마이클 브라운 등 셀 수 없이 많은 흑인들이 경찰의 폭력에 희생되었다. 그때마다 방화와 약탈을 동반한 소요 사태가 벌어졌는데, 이는 미국 사회에 적지 않은 후유증을 남겼다. 하지만 달라진 것은 없다.

가해 경찰은 제대로 처벌 받지 않았고, 여전히 흑인들은 죽어 간다. 실제로 경찰의 과잉 진압에 대한 기소율은 1.32%, 처벌 비율은 고작 0.32%에 불과하다. 숨을 쉴 수 없다는 조지 플로이드의 마지막 절규는 흑인으로 살아온 삶 모두를 지배해 왔던 굴레였는지도 모른다.

그 누구도 자유롭지 못한 차별, 사람의 존엄을 위한 차별금지법을 위하여

차별당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차별받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차별 받는다. 차별당하는 사람은 차별기제가 내재화되어 차별을 당연하게 여기기도 하며, 차별하는 사람도 자신이 누군가를 차별하고 있다고 인식하지 못한 채 차별에 동참한다. 우리 사회에서 차별을 조장하는 법과 제도는 여전히 존재하며 사회적 분위기도 차별을 당연한 듯 받아들이기도 한다. 인종이나 장애, 계급, 출신, 학력, 성별, 국적, 성적 취향 등 차별과 배제의 이유와 논리는 차고 넘친다. 그런데 그 은밀하지만 당당하기까지 한 차별의 이유와 목적은 차별하는 사람, 차별당하는 사람으로 자로 잰 듯 구분되지 않으며 차별당하는 사람이 차별하기도 하고, 차별하는 사람이 다시 차별당하는 등 엉킨 실타래처럼 혼재되어 있어 구분조차 모호하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타인과 나를 구분해 차별함으로써 세력을 모으고 과시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위’로의 차별이 아니라 ‘아래’로의 차별이다. ‘더 아래’를 만들어 구분 짓고 차별함으로써 스스로 ‘위’가 되고자 하는 순간, 차별은 혐오로 이어지고 잔혹한 폭력으로 발현된다. 도대체 누가 ‘위’이고 누가 ‘아래’일까? ‘위’는 정의이고, ‘아래’는 부정의인가?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프리즘을 통해 세상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우리 안에 끈끈하게 달라붙어 있는 차별기제와 차별행위들을 서로 지적하고 경계해야 하며, 차별금지법이라는 제도의 틀 안에서 시정되는 세상이 프리즘 안 풍경이 될 때, 우리는 차별이란 혐오의 굴레를 인식할 수 있지 않을까? 조지 플로이드의 8분 46초가 억압과 폭력의 시간이 아닌, 이 땅의 모든 차별을 반대하기 위한 간구와 연대의 시간이기를 소망한다. [더인디고 The Indigo]

오래 전에 소설을 썼습니다. 이제 소설 대신 세상 풍경을 글로 그릴 작정입니다. 사람과 일, 이 연관성 없는 관계를 기꺼이 즐기겠습니다. 그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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