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살아 있는 偶像 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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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나 외에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출애굽기-

노루 꼬리만한 겨울해가 어느새 설핏 기우는구만요. 이런 빌어먹을, 눈이 부시도록 화려함서도 화냥년 서답 빤 개숫물처럼 검붉은 저 빛은 항상 이 놈을 주눅 들게 만드능마요. 왜냐하면 저 빛은 당신의 눈빛과 비슷헝게요.

오늘 이 놈의 무례한 방문을 반겨주셔서 대단히 감사험다. 이 놈이 요렇코롬 외람된 줄 알면서도, 당신이 전혀 반겨주지 않을 것이란 걸 미리 짐작했으면서도 찾아온 것은 다름이 아니라 터무니 읎이 부풀려진 당신의 어린 날의 기억을 바로 잡아주어야 되겄다 허는 생각 때문임다. 물론 이 놈의 쓰잘데기 읎는 기억으로는 당신의 그 잘난 어린 날의 고난과 역경 그라고 불굴의 투지로 견뎌온 당신의 인내를 모두 들추어내 감 놔라 배 놔라 헐 수도 읎는 처지임을 누구보다도 이 놈 자신이 잘 알고 있슴다.

자, 이 놈 술 한 잔 받으십쇼. 당신이 즐겨 마신다는, 신문지상에 오르내려 품귀가 났던 그 고급양주는 아니지만 이 놈과 같은 처지로 사는 많은 사람들이 일 년에 고작 한두 번 맛을 볼까말까 허는 귀한 술입지요. 귀밑머리에 희끗하게 무서리가 내려앉은 걸 보니께 당신도 세월의 무상함만은 어쩌지 못하겠심더 그려. 아, 바쁘시니껴? 알겠슴다. 당신을 만나니께 그 지나온 세월의 감회로 이 놈이 되잖은 감상에 잠시 젖어 쓰잘데기 읎는 사설을 늘어놓고 말았씀다. 죄송하구만요. 되도록이면 짧게 이 놈이 찾아온 이유를 밝히도록 합죠.

아이고, 그럴 리가 있겠니껴? 왜 이 놈이 당신이 피와 땀으로 이룩한 금자탑에 무신 억하심정이 있다꼬 똥물을 끼얹겠습니꺼? 그런 말씸을 하시먼 참말로 섭섭허네요. 설사 이 놈이 그런 흑심을 품었다고 해서 대수니껴? 그래봐야 바위에 계란던지기에 지나지 않다는 것쯤은 잘 알고 계시잖습니꺼? 물론 두 사람의 갑작스런 죽음이 불러일으킨 분노 탓에 여기까지 오게 됐슴다만-.

아무튼 이 놈의 방문으로 당황하셨다면 죄송험다. 그러나 당신이 어린 시절에 저지른 짓거리들로 을매나 많은 사람들이 가슴에 지울 수 읎는 상채기가 남았는지, 또 고통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나 계십니꺼?

담배라도 한 대 태우시죠. 그라먼 긴장이 쪼매 가라앉을 것잉게. 이 놈은 당신에게 서글픈 소식을 전해야 할까 봅니다.

차볭문(車炳文)이를 기억하고 계시니껴? 잘 모르시것다구요? 거, 왜 있잖습니껴. 두 눈이 왕방울만하게 크고, 휘파람으로 <저 높은 곳을 향하여>도 아주 구성지게 잘 불로제끼던 놈 말임다. 다리병신이었는데, 목발을 짚고 댕기다가 영 불편하다면서 기댕기다가 당신한테 거지근성 못 버린다꼬 무던히도 얻어터진 볭문이가 생각나지 않는다는 것입니꺼?

아니, 대체 당신은 그 동안 까마구 고기를 을매나 쳐드셨길래 글쎄 차볭문이를 잊었다는 겁니꺼? 이 놈이 시방 흥분하지 않게 되었습니꺼? 아무리 산이 강으로 변하고 또 강이 산으로 변할 세월이 지났다꼬는 혀도 생명을 구해준 사람의 이름 석 자조차 기억할 수 읎는 것이 말이나 되는 거냐구요. 참말로, 기가 막힐 지경이네, 당신이란 사람은… 에이, 관둡시다. 어차피 지난날의 잘못을 어줍잖게시리 추궁을 하러 온 것은 아니니께. 예상치 못한 건 아닙니다만 막상 당하고 봉께 기가차고 맥살이 빠집니다 그려.

볭문이 그 친구… 달포 전에 죽었심다. 당신의 그 악랄한 보복으로 얻은 그 빌어먹을 지랄병으로……. 아니, 간질병으로 죽었다고는 딱히 단정할 수 읎는 미심쩍은 의문이 찜찜하게 남긴 했습니다만. 이 놈이 무슨 노회한 형사나리도 아닌 주제 꼴에 그 놈의 사인에 일말의 의구심을 품은 건 놈의 주검을 확인했던 젊은 의사의 자발읎는 입방정 때문입죠.

지지리도 순하기만 혔던 그 놈은 변변한 직장마저 얻을 수 읎었죠. 시도 때도 읎이 나타나는 발작증세 탓이었죠. 허지만 그건 한낱 볭문이 그 놈아 스스로 팽개쳐버린 평범한 생활에 대한 되잖은 변명에 지나지 않았습죠. 놈의 귀금속 공예 기술은 남달리 탁월해서 추한 발작에도 불구허고 놈의 기술을 탐냈던 세공업자들은 을매든지 있었으니께.

그러던 놈이 한 달 전에 웬일인지 일자리가 읎겠느냐고, 이 놈에게 전화를 했지 뭡니꺼. 그의 기술을 탐내던 세공업자 중에 한 사람이었던 이 놈은 집으로 조망간 찾아오라던 짧은 전화내용과 평소에 다름읎던 어투 어디에서도 죽음을 예감할 티끌만큼의 의혹도 느끼지 못했구만요. 후에 안 일입니다만, 그 날 그런 식의 전화 초청을 받았던 사람은 이 놈뿐만이 아니었지 뭡니꺼. 그 동안 게으른-사실 그 놈의 하루살이는 이 놈에겐 한낱 게으름으로만 보였는데-그의 생활 태도를 못마땅해험서도 생계에 보태라꼬 꼬깃한 지폐 몇 장을 쥐어주는 데 인색하지 않았던 몇몇 친구들이 이 놈과 똑같은 내용으로 그의 임종에 초청되었던 것입죠.

우리가 도착혔을 때에는 벌써 발작할 때 비어져 나왔을 허연 거품 침으로 범벅이 된 채 놈의 몸뚱이는 젖은 빨래처럼 힘읎이 방안에 널브러져 있었슴다. 이 놈과 친구들은 가물거리는 의식 속에서 허옇게 뒤집어진 눈알로 천장만을 쳐다보고 있는 놈을 퍼뜩 병원으로 옮겼지만, 의사는 어느새 닫혀진 눈꺼풀을 몇 번 까보고는 고개를 내젖더구먼요. 그 살집이 좋은 의사양반은 거, 뭐라드라 아비산이나 모르핀이라던가에 아매 중독된 것 같담서 축 늘어져 자빠진 놈의 소매를 걷어올려 멍자국이 시퍼런 팔뚝을 보여주더구만요.

까짓 훌훌 태워 버렸심더. 이 놈이 주동이 되어 화장터 화로 속에 그 쓰잘데기 읎는 몸뚱이를 소지(所持) 태우듯 연기로 날려보냈구만요. 제깟 놈에게 무신 여한이 남았겠습니꺼? 무슨 여한이 남아 아무도 돌보지 못할 묘지에 눕겠습니꺼. 아금받게 살았다면 머리 풀고 곡할 계집이나 쓰디 쓴 술잔이나마 눈물 찔끔대며 올릴 씨 하나 왜 얻지 못했겠심꺼? 지지리 궁상, 개도 안 물어갈 똥고집으로 살았던 놈의 자취방을 정리하다 발견된 두 통의 우편물은 이 놈에게 암담한 절망의 기억을 기어코 되살려주고 말더구만요.

한 통은 차볭문이의 변변치 못한 쥐꼬리 같은 살이 중에서 그나마 치열하게 타올랐던 사랑의 대상인 성미란(成美蘭)이란 여자의 죽음을 알리던 부고였고, 다른 한 통은 당신 앞으로 보냈던 것이었지만서도 수취인 불명으로 반송된 볭문이의 자조와 애원이 담긴 편지입디다. 그걸 보는 이 놈의 눈에 불같은 게 확 일더구만요. 상대를 알 수 읎는 분노, 끝읎는 나락으로 한읎이 떨어지는 것 같은 그 절망감이라니…….

저 아득한 세월의 갈피 짬에 언제까지나 묻어두고 싶었던 이 놈의 영악스러움, 젊은 날의 저임(低賃)과 피로에 지친 살이를 통해서 자연스레 터득한 이기적인 감정의 여과……

이 놈 나름의 양심의 저울질로 읽은 눈금으로 과거의 고역스러움을 정당화하려 했던 부끄러움이 각다귀처럼 무수한 밤을 찾아와선 술병과 불면으로 이 놈을 괴롭히더구만요. 그래서 이 놈은 어느 틈엔가 스스로 퇴색시키고 부인해버렸던 그 날의 저주스러운 추위를 기억해내곤 당신을 꼭 만나야 한다카는 결정을 내리고 말았슴다.

그 날 밤을 기억하십니꺼?
[더인디고 The Indigo]

오래 전에 소설을 썼습니다. 이제 소설 대신 세상 풍경을 글로 그릴 작정입니다. 사람과 일, 이 연관성 없는 관계를 기꺼이 즐기겠습니다. 그뿐입니다.
승인
알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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