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살아 있는 偶像 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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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방학하기 꼭 일주일 전 주일 밤에 미란이에게 저지른 당신의 파렴치한 짓을 기억하신다면 이 놈의 심정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아까도 말했듯이 <가나안>은 캐나다의 모(某)선교 자선단체의 원조를 하나님의 양식인 만나로 여기고 있었습죠.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 누구도 가난했던 시대였기에, 우리에게 떠맡겨진 궁핍은 그만큼 절실한 맹종의 질서를 강요했는지도 모릅니다. 그 모진 궁핍을 그리스도의 배려로 헤쳐나가겠다는 민원장의 의지는 그날 밤 끝날 줄 모르고 계속되던 기도를 한층 간절하고 눈물겨운 넋두리로 변하게 만들 만큼 절박했죠.

“…오, 사랑하는 아버지시여 여기 모인 당신의 어린 양떼들을 긍휼히 여기소서. 무엇이든 기도하고 구하는 것을 받은 줄로 믿으라 하셨으니, 그대로 믿으매 굶주린 우리 죄인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셨사오니 감사, 감사합니다. 악한 자 모인 오욕의 가시덤불에 가나안이란 성령의 땅을 주시어 스스로 속죄하도록 기회를 허락하시니 이 또한 감사, 감사하옵고……”

애절하게 감겨드는 민원장의 구애의 흐느낌은 이 놈에겐 하나님에 대한 막연한 궁금증을 불러일으켰슴다. 꿇어앉은 무릎이 뻑뻑하게 저려오는 것을 느끼면서도 민원장의 낭창낭창하게 혀끝에 감기는 그 달변은 공기와 물과 불을 말씀으로 빚었다는 전지전능의 존재를 허여멀쑥한 서양인의 모습으로 혼동하고 있었습죠. 결국 하나님이 전능한 존재라는 건지 아니면 매달 어김읎이 구호물품을 보내오는 양코배기들이 위대하다는 건지 아리송하게 뒤죽박죽으로 기도가 흘러갈 즈음 이 놈은 저린 다리와 불알이 터질 것처럼 꽉 찬 오줌으로 허리를 배배 꼬기 시작했슴다.

그 날 이 놈이 그 너저분한 옥상에서 벌어진 광경을 목격하게 된 것은 순전히 아랫배를 쥐어짜듯 했던 오줌탓이었습죠. 오줌이 마렵다는 핑계로 겨우 예배소를 빠져나온 이 놈은 오줌을 누고나자 예배소로 다시 들어갈 마음이 읎어졌던 것임다. 그렇다고 방으로 갔다가 사감(舍監)들의 눈에라도 뜨이면 지청구만 들을 것 같아 숨어든 곳이 바로 옥상이었죠.

옥상에는 참 별들도 많습디다. 이 놈이 세상에 나서 밤하늘에 그렇게 많은 별들이 떠 있다는 사실을 그날에서야 알았을 정도였으니께. 하릴읎이 별구경을 하고 섰는데 어디선가 사람의 웅얼거림 같은 소리가 낮게 들려왔슴다. 처음엔 민원장의 기도소리가 바람에 실려와 들리는가 싶었습죠. 헌데 그게 아니었다니께요. 울컥 무섬증이 일데요. 결코 낯설지 않은 소리들이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유지하면서 바람을 좇아 까맣게 익은 옥상의 신산스러운 풍경 속을 가만히 맴돌더구만요. 가쁜 숨을 몰아쉰 이 놈은 뒤숭숭하게 귓속을 후벼파며 오직 깨알 같은 별빛을 길 삼아 가만히 사위를 두릿거렸슴다.

그때 목덜미를 차갑게 스치는, 마치 어린애를 을러대는 듯한 아니, 탄식에 가까운 낮은 목소리가 제법 또렷하게 들려왔던 것임다. 겁은 났지만 그에 못지않게 호기심이 동하더구만요. 그래서 소리가 들려왔던 물탱크 쪽으로 조심조심 발끝으로 걸어갔슴다. 그런데, 그 눅눅한 물탱크 뒤에서는 아주 엄청난 일이 막 벌어지는 것임다. 미란이의 신음에 섞여 거푸 비어져 오르는 입김……, 은밀하게, 그러면서도 매우 치밀하게 그녀의 허름한 스웨터 앞섶을 더듬고 있는 웬 사내의 분주한 손놀림과 시근덕거리는 거친 숨소리가 이 놈의 숨통을 딱 막는 거였슴다. 제기랄…

저녁이라도 먹자고 그러셨죠? 대신 쓴 소주나 한 잔 마십시다요. 어차피 이미 물 건너간 사단이라면 소주에라도 취해서 그 터무니읎이 비틀려버린 인생을 인정할 수밖에 읎었다고 변명하는 외에 다른 도리가 읎겠습죠.

당신의 오만스런 겁탈의 현장을 도망치듯 빠져나오면서 이 놈은 한 아이의 초라한 뒷모습이 한 발 앞서 옥상을 내려가고 있는 것을 얼핏 봤더랬슴다. 만약 그 아이가 볭문이었다면 이 놈은 당신과는 전혀 다른 형태로 조소와 경멸의 대상으로 그네들의 가슴에 남았을 테구만요. 커, 오늘 술맛은 유난히 쓰네……, 씨벌.

쌩고들의 낙오 읎는 집합을 확인한 당신은 울화를 삭이려는 듯 입가에 옅은 웃음기를 물고 있었죠. 보일 듯 말 듯한 그 웃음은 이제 막 깊은 잠에서 깬 듯 까무륵대는 형광등의 먼지 낀 반사광 밑이었기에 더욱 싸늘한 빛을 띄었슴다. 당신의 오른손에 들린 각목은 모둠발 자세의 불편함조차 잊게 할 만큼 우리를 긴장으로 달아오르게 했슴다. 곧이어 몰아닥칠 무서운 린치를 상상하면서 이 놈은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었슴다. 정말 참기 어려운 고통의 시간이었죠. 한기가 가끔 양 볼을 핥고 스치는 냉랭한 기숙사의 조붓한 복도 끝에 열을 지어 선 우리는 그 공포스런 분위기에 점점 침식당하고 있었죠.

손에 땀이 차기 시작하자 마른 침으로 타 들어가는 입술을 적시는 낮은 소리 외엔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죠. 이 놈은 볭문이와 당신의 표정을 번갈아 훔쳐보는 행위로 무력한 항의를 드러냈슴니다만 소용읎는 일이었슴다. 그때 볭문이의 얼굴은 모든 것을 체념한 듯 그저 담담했고 반면에 당신의 얼굴에는 치밀어오르는 화를 자제하려는 듯한 미세한 경련이 얼핏 스치는 것을 보았슴다. 영문자 알파벳과 무수한 수학공식에 저당 잡혔던 밤잠과 흘린 코피의 대가가 송두리째 물거품으로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위기감 앞에서도 당신은 한치의 감정의 흐트러짐도 읎이 <가나안>의 당당한 여호수아로 버티고 있었던 것임다. 다만, 예사롭지 않은 살기마저 뿜어대는 그 눈빛에는 보잘것읎는 것들의 시기로 산산이 부서질 수도 있는 자신의 모래성과도 같은 처지를 원망하는 듯 옅은 물기마저 어려있었슴다.

당신의 ‘파블로프의 개’에 불과한 우리는 웃통을 벗으라는 호통에 결코 당황하지 않았슴다. 각목에 묻어날 살점과 억울한 아픔만을 예감하고 있던 열다섯 명의 쌩고들은 당신의 이마 언저리에 돋은 핏줄로도 유리파편처럼 따가운 소름에 몸서리를 쳤을 테니께요. 종소리에도 침을 흘린 개와 별반 다를 바 읎는 철저한 피학의 조건반사에 우리는 이미 익숙했던 것입죠.

옥상으로 모두 올라가라는 낮고 매서운 음성에 이 놈은 어쩌면 가혹한 매질 대신에 하룻밤 동안의 기합으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안도감에 잠시 마음의 여유를 찾을 수 있었더랬죠. 손가락을 가운데로 오므려 모아진 손가락 끝을 숟가락 뒷등으로 때리는 당신의 간특한 매질을 면하는 길이라면 이 놈은 하룻밤의 기합쯤은 달게 받으리라고 마음까지 다지고 있었으니께요. 그러나 기숙사 출입문을 나서는 순간 이 놈은 금방 후회하고 말았슴다. 벗은 몸뚱이를 무참히 할퀴는 그 겨울의 추위를 당신의 교활한 마음은 이미 계산에 넣고 있었던 것임다.

헐벗은 나뭇가지 사이로 날카롭게 파고드는 찬바람의 혹독함은 맨살을 도려낼 듯 기승을 부렸죠. 옥상에서 횡대로 늘어설 무렵에는 이미 뼈마디만 남은 어깻죽지는 근육경련을 일으켜 살을 저미는 듯한 아픔으로 전해져왔슴다. 우리의 이 부딪치는 소리가 바람결에 섞여들었슴다. 추위에 얼어버려 금방이라도 툭 터져버릴 것만 같은 살갗을 입김으로 녹이면서 버티려는 우리를 무감동한 눈길로 훑어보던 당신은 볭문이를 한 걸음 뒤로 물러서게 했습죠. 그리고는 우리를 원을 그려 바닥에 앉혔슴다.

얼음처럼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앉은 우리 앞에 예닐곱 개의 자갈이 놓일 때까지도 아무도 당신의 속셈을 눈치채지 못했슴다. 이 놈이 그 자갈의 개수가 우리보다 적다는 것을 눈어림으로 짐작하는 순간에 당신의 음모는 그 흉측한 모습을 드러냈던 것임다. [더인디고 The Indigo]

오래 전에 소설을 썼습니다. 이제 소설 대신 세상 풍경을 글로 그릴 작정입니다. 사람과 일, 이 연관성 없는 관계를 기꺼이 즐기겠습니다. 그뿐입니다.
승인
알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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