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승준의 다름알기] 교사의 기말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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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xabay
안승준 더인디고 집필위원

[더인디고=안승준 집필위원]  학교에서 교사에게 주어지는 일 중 가장 재미없는 일이 무엇이냐고 물어본다면 난 단호하게 시험감독이라고 말할 것 같다. 아무 일도 안 해도 되니 편하지 않냐고 물어보는 이도 있겠지만 아무 일도 할 수 없기에 정말 지루한 시간이기도 하다. 죄짓고 감옥에 갇힌 이들에게도 옆 사람과 대화할 자유 정도는 주어지고 이런저런 책들도 읽을 수 있게 해 준다고 알고 있는데 그 시간만큼은 내게 주어진 자유의 범위가 죄수들보다 못하다.

난 시험과 관련된 몇 가지 간단한 안내를 제외하면 어떤 이와도 대화를 할 수 없고 내게 주어진 읽을거리라고는 오직 그 시간에 배정된 시험지 밖에 없다. 그래서 난 이번 시험 때에도 몇 쪽 되지 않는 점자 시험지를 손끝이 닳도록 읽고 또 읽었다. 국어시간에도 과학시간에도 일본어 시간에도 그랬다. 문학 시험지의 몇몇 지문이나 이따금씩 발견되는 재미있는 문장들을 빼고 나면 흥미를 끄는 내용이라고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것이 시험지이지만 그것이 그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기에 큰 선택의 여지는 없다.

그런데 참으로 씁쓸한 것은 교사의 경력을 늘려갈수록 시험지 속 문제들 중 내가 풀 수 있는 문항의 수가 점점 줄어든다는 것이다. 나의 기억 능력이 가진 노화현상이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많은 과목이 경향을 바꾸고 그로 인해 문제의 모양도 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나의 전공인 수학 같은 순수학문은 트렌드가 변해도 세부내용들은 그리 큰 변화가 없지만 과학에서 말하는 신소재나 사회에서 언급되는 현상들은 때로는 생전 처음 들어보는 것들도 있다. 쓸데없는 승부욕 충만한 내 성격상 풀어 보고 또 풀어보고 교무실 돌아와서 인터넷 검색까지 하다 보면 어느 밤엔가는 시험지 들고 끙끙대는 악몽까지 꾸고는 한다.

따지고 보면 난 그런 문제들을 꼭 풀어야 하는 책임 같은 것은 없는 사람이고 그보다 이전에 관련한 개념들을 학습한 적도 없기에 문제의 답을 알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중고등 학생들에게 주어진 문제지를 나름 공부 좀 했다는 교사가 못 풀어낸다고 하는 포인트가 때때로 내 자존심을 건드리고는 한다.

나는 수학교사이다. 학생들에게 수학 문제를 풀어주고 수학과 관련한 개념들을 전달하는 것은 분명한 나의 몫이고 그와 관련한 자부심이나 책임을 느끼는 것 또한 내 자유의 영역에 속한다. 그러나 다른 과목에 있어서만큼은 난 가르치는 사람도 아니고 어쩌면 학생들보다도 배움이 짧은 사람일 수 있다. 그렇기에 모든 과목에는 각각의 선생님이 존재하고 그들은 모두 각자의 영역에 충실한 역할을 수행한다.

학교는 10여 과목의 전문 선생님들이 모두 있을 때 비로소 시간표를 완성할 수 있는 것이다. 아주 뛰어난 천재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인간은 전문성을 높여갈수록 그 영역은 좁혀진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많은 과목을 배우지만 수학교사가 되면서 난 수학을 가르치는 데에 특화된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그런 시간들 동안 많은 다른 부분들은 또 다른 이들의 전문분야가 되었다. 다른 직업을 가진 전문가들도 다들 그럴 것이다.

난 행정실 선생님들보다 행정업무를 잘 하지 못하고 청소하시는 선생님들보다 청소를 잘하지 못하고 조리하시는 선생님들보다 요리를 잘 하지 못한다. 커다란 학교가 운영되는 속에서 나는 분명 전문적인 역할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크기는 아주 작다. 세상으로 따지면 그 크기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더 작을 것이다. 경력을 늘려가고 나이를 먹어가면서 아주 단순한 진실을 잊고 오만해질 때가 있다.

난 분명 전문가이긴 하지만 그것은 나의 분야에 한한다. 세상은 수많은 다른 전문가들이 함께 존재할 때 비로소 움직인다. 기말고사 시험지 중 내가 풀 수 있는 문제가 줄어가는 것처럼 세상의 어려운 문제들은 더 많은 다름의 협력이 필요하다. 짧지 않은 시험감독의 시간 속에서 난 잊고 있던 겸손의 의미를 찾았다. 앞으로의 교사 경력에서 시험감독의 시간은 나의 작음을 되돌아보는 시간이 될 것 같다. [더인디고 The Indigo]

한빛맹학교 수학 교사, "우리는 모두 다르다"를 주장하는 칼럼리스트이자 강연가이다. 밴드 플라마의 작사가이자 보컬이다. 누구나 불편하지 않은 세상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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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평
3 years ago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