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석의 세상풍경] 내 삶의 위치에서 보이는 열 가지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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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xabay

[더인디고=이용석 편집위원]

쓰는 자가 보는 풍경

이용석 더인디고 편집위원

장마의 끝물이 며칠째 질기게 이어지고 있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 낮게 내려앉은 하늘 가득한 먹장구름은 세상의 지붕이 되었다. 코끝을 간질이는 물 비린내는 억수같이 퍼붓는 비 풍경을 연상시키지만 좀체 무른 빗줄기는 거세지지 않는다. 사위를 휘감은 축축한 대기는 뿌연 는개와 뒤엉켜 어두운 터널을 이뤄 숨 막힐 듯 탁하고 무겁다. 그동안 아홉 개의 터널을 지날 때마다 통과의례처럼 겪었던 답답하고 고역스러운 기억들이 새삼스럽다.

쓰는 자는 기억을 글로 옮기는 사람이 아니라 마음의 풍경을 그림을 그리듯 글로 표현해야 한다. 때로는 정밀화를 그리듯 촘촘하게, 때로는 풍경화를 그리듯 선연한 색감으로 옷감을 짜듯 써야 한다. 하지만 마음의 풍경이 나의 것이라는 믿음이 없을 때 글은 버성긴 문짝처럼 헐겁고 삐걱거린다.

신산스럽기 짝이 없는 아홉 개의 풍경들 모두 새롭게 목격한 것들은 아니었다. 오히려 진작에 보고 들었던 풍경들이어서 상투적인 경험과 시간의 더께들이 눌어붙어 만들어진 또 다른 잔상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글은 도둑맞을 수 있지만, 그 글을 쓰기 위한 자기만의 풍경은 도둑맞을 수 없다. 쓰는 자가 목도한 풍경은 결국 글감이고, 쓰는 행위는 글감을 대하는 태도일 텐데 문제는 이 태도가 오히려 풍경을 지배하게 되면, 쓰는 행위는 어설픈 위선과 위악을 맴돌 뿐이다.

쓰는 자는 고백한다. 풍경이 일그러져 보이거나 가슴 안에 상(像)이 맺히지 않으면 이불을 뒤집어쓰고 책을 읽으며, 어떤 언어로 풍경을 그려낼지 고민할 것. 풍경 안에 기꺼이 스스로를 내던져 연대하며 공감하지 못하면 글로써 표현하지 말 것. 간명하고 정확한 문체와 관점을 통해 풍경을 바라보는 태도를 가질 수 없으면 쓰기를 멈출 것. 그렇게, 쓰는 자는 풍경 안의 모든 것들을 아우르기 위한 대화에 기꺼이 나서야 한다.

빈곤과 차별, 혐오 그 진부한 테제들

아홉 개의 풍경.

내가 그렸던 살풍경들은 빈곤과 차별 그리고 혐오라는 진부하기 짝이 없는 테제를 겉돌았을 뿐이다. 이 낡아빠진 테제들은 세기를 넘나들며 다뤄졌으나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으며, 답은 명확하지만 그 답으로 가는 길은 험난하고 요원하다. 그래서 진부하고 낡았지만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는 이유는 ‘당하는 자’들의 간절함 때문이다. 간절함이 채워지지 않으면 섭섭함이 되고, 이 섭섭함이 쌓이면 분함이나 노여움에 가닿는다. 빈곤은 이제 체험상품이 되어 부자들의 수익모델이 되는 사회, 법적으로 ‘정당한 차별’이 용인되는 사회, 그리고 ‘당하는 자’들에게 향하는 온갖 혐오 발언과 행위들을 표현의 자유로 여기는 사회, 급락하는 주가에는 돈을 쏟아붓지만 죽어가는 ‘당하는 자’는 “자연” 적으로 죽어가기를 권유하는 사회. 그래서 아홉 개의 풍경을 바라보는 마음에는 분노가 뒤엉킨 간절함만이 가득했다.

여우에게 포도나무 맨 끝가지에 먹음직스럽게 열린 포도 맛은 언제나 시거나 떫거나, 써야 한다. 포도가 시거나 떫거나 써야 하는 이유는 여우의 능력으로는 따먹을 수 없기 때문이며, 따먹을 수 없으니 누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우는 희망한다. 자신의 것이 아닌 저 포도는 누구의 것일 수 없어야 한다고. 니체는 이렇게 약자가 강자에게 품는 질투, 열등감, 증오심 즉, ‘강자를 시기하는 마음’을 ‘르상티망(ressentiment)’이라 정의했다.

니체의 주장 모두를 동의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르상티망’이 정치적으로 이용되고 있다는 점은 동의할 수밖에 없다. 이를테면 근대 민주주의는 ‘자유’와 ‘평등’이라는 진보적 가치가 피지배계급의 르상티망을 자극했다. 혁명가들은 ‘자유’와 ‘평등’이라는 개념을 피착취 계급이나 피지배계층 사람들에게 주입함으로써 사회변혁을 추동했고, 혁명을 통한 정권 쟁취의 논리적 근거를 제공한 것도 ‘르상티망’을 이용한 전략이었다.

최근 이슈화되고 있는 ‘누구나 잘 사는 사회’나 ‘지속가능 사회’의 개념도 ‘르상티망’을 이용하는 현대 정치인들의 주요 구호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그동안 우리가 보아왔던 아홉 개의 풍경도 ‘당하는 자’들의 ‘르상티망’에 불과할까? 아무려나 그 간절함이 고작 ‘르상티망’이라면 억울한 일이다.

열 번째 풍경을 향한 우리의 상상(想像)

이제 우리는 빈곤과 차별 그리고 혐오라는 구시대의 테제들을 극복하고 새로운 시대, 새로운 ‘르상티망’을 찾아 나서는 상상을 해야 한다. 사람과 사람이 서로를 향해 견주는 빈곤과 차별 그리고 혐오를 대신해 우리의 삶을 자극하는 새로운 테제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고민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자신의 능력으로는 따먹을 수 없는 포도 맛이 언제나 시거나 떫거나, 쓰다고 스스로 위로하며 물러설 이유는 없다. 몸이 부서져라 나무에 부딪쳐 기어코 포도 맛을 보려는 간절함이 새로운 시대의 ‘르상티망’이어야 한다.

물기 가득 머금은 잿빛 는개에 휩싸였던 열 번째 터널 입구가 희미하게나마 보인다. 터널 안 풍경이 열 번째 풍경이라면, 그곳으로 가는 길 위에 지금, 우리는 서 있다. 이제 그 풍경 속에 온전히 우리를 담을지, 애써 외면하고 비켜갈지를 선택해야 하는 우리는 여전히 발걸음을 주춤대고 있다. 이제 어쩔 셈인가? 선택은 자유다. [더인디고 The Indigo]

오래 전에 소설을 썼습니다. 이제 소설 대신 세상 풍경을 글로 그릴 작정입니다. 사람과 일, 이 연관성 없는 관계를 기꺼이 즐기겠습니다. 그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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