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바리데기꽃 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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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늘 한 뼘 없는, 뙤약볕이 서릿발처럼 하얗게 내려앉은 신작로 위에 할머니는 망연하게 서 있다. 노인의 흐린 안정(眼精)은 대수로울 것도 없는 촌락 풍경을 꼼꼼하게 톺고 있는 듯하다. 질식할 듯 뜨거운 공기가 호흡을 방해한 탓일까, 할머니는 가끔씩 옥다문 입을 벌려 가쁜 숨을 몰아쉰다. 알이 빽빽한 옥수수처럼 정갈하던 할머니의 잇바디도 끝내 세월이 너리 먹어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고 움펑 꺼져버린 검은 구멍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미란은 할머니의 고무신을 덩그마니 담고 있는 한 줌의 그림자가 마치 노인의 남아있는 살이의 전부처럼 여겨져서 공연히 마음이 섬뜩하다.

유난히 몰강스럽던 할머니는 미란의 딸아이 연(蓮)이가 걸음마는커녕 제대로 앉지도 못했던 이유가 뇌성소아마비(腦性小兒痲痺)라는 병 때문이라는 사실이 확인되자 외증손녀를 단 한 번도 손수 받아 안으려 하지 않았다. 유달리 식탐이 강한 아이의 투정에 꼿꼿한 표정으로 말하곤 했다.

원래 사람 구실 못하는 배냇병신들이 음식을 밝히는 법이지. 아무래도 세상이 내리막길인가 보구나. 저런 몰골이 인두겁을 쓰고 사람 행세를 하려고 태어나니 말이다. 내가 너무 오래 살았어.

그런 소릴 들을 때마다 미란의 가슴은 속절없이 무너지곤 했다. 금방 푼 짐을 바리바리 싸고 어머니의 만류도 뿌리치고는 총총히 친정집 대문을 나오곤 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아이를 위해 굿을 하겠다니, 어이없기도 하고 한편으론 이제 할머니가 돌아가시려는가 하는 외람된 생각으로 입안에 쓴 물이 고였던 것이다.

“할머니, 덥잖아요. 왜 그렇게 땡볕 아래 서 계세요?”

“저 고집이라니, 쯧쯔…”

마을로 이어지는 신작로 초입의 구멍가게 앞에 놓인 평상에 앉아 지쳐 잠이 든 미란의 딸아이에게 연신 손부채질을 하고 있던 어머니가 못내 마땅치 않은 듯 미간을 찌푸리며 끌탕을 친다.

“내 이런 먼 길인 줄 알았으면 운동활 신고 오는 건데 그랬어.”

어머니는 까만 에나멜 구두를 벗어 평상 모서리에 탁탁 쳐 흙을 털어내고는 퉁퉁 부은 발등을 주무르며 히물쩍 웃어 보인다.

신작로 양편으로 머리를 푼 볏 포기들이 시원하게 눈에 얼비친다. 마을은 병풍처럼 에둘러진 산등성이 밑으로 야트막하게 잠겨있다.

할머니의 족대김에 마지못해 따라나섰지만, 너겁 한 오라기라도 붙들고 싶은 악지가 미란의 등을 떠밀었는지도 몰랐다. 2년 남짓 이 병원 저 병원으로 뒤넘이를 치며 쫓아다녔으나 아이의 병색은 호전될 기미가 없었다. 처음에는 그녀보다 더 등 달았던 남편 진우는 어느새 아이의 존재를 버거워하더니 오늘 아침에는 아이를 들쳐 업는 미란을 흥뚱항뚱 쳐다볼 뿐 좀체 입을 열지 않았다.

이제 그만 현실을 인정하자는 눈치였으나, 미란은 애써 외면했다. 아니, 어쩌면 불구의 딸아이가 겪을 불행보다는 자신 앞에 눈을 부라리고 있는 투그린 숙명을 용납할 수 없다는 가당찮은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남편의 눈총을 꼭뒤로 의식하며 총총히 현관문을 나섰던 것이다.

“인자, 다 왔구마는. 저기 뵈는 산구비만 돌면 된다.”

문득 미란은 허공에서 정지된 노인의 손가락 끝에 얹힌 산자락을 향해 눈길을 보내다가 깜짝 놀란다.

아, 막내고모……. 쨍쨍한 햇볕에 토마토 색깔이 된 할머니의 얼굴은 십 오년 전에 죽은 막내 고모와 너무도 닮아 있다. 망자(亡者)와 닮은 때문일까, 그 모습이 귀기스럽기까지 하다.

“왜 그러니?”

자릿값으로 산 빙과를 핥고 있던 어머니가 미란의 어깨를 툭 친다. 그 서슬에 겨우 정신을 수습한 미란은 어느새 잠에서 깨어난 아이가 어머니가 쥐어주었을 빙과를 붙들고 히뜩 벌어진 입에 우겨 넣는 꼴을 보고는 아연해진다. 아이의 손과 얼굴은 함부로 휘둘린 빙과에서 녹아내린 단물로 온통 범벅을 하고 있다.

“아이, 엄마는 뭣하러 저런 걸 주셨어요.”

그제야 어머니는 끈끈한 단물에 온통 더럽혀진 아이를 보고는 아이고 내 강아지, 하며 질겁한다. 어머니는 아이의 손에서 얼른 빙과를 빼앗고는 핸드백에서 손수건을 꺼낸다. 먹을 것을 빼앗긴 아이는 온전치 못한 팔을 버르적대며 기어코 울음을 터뜨리며 아망을 부렸다.

“오냐, 내 못난 강아지…….”

어머니의 손길은 매우 다급하게, 그러면서도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단물에 끈적이는 아이의 잘 펴지지 않는 손가락들을 일일이 펴서 꼼꼼하게 닦아내고 있다. 여전히 아이는 울고 햇빛은 지칠 줄 모른 채 다글다글 끓어오르고 있었다. 미란은 왈칵 설움 같은 짜증이 인다.

따지고 보면 미란이 역시 할머니와 똑같은 심경이었다. 첫돌이 지나도 기기는커녕 앉지도 못하는 아이를 그저 늦둥이쯤으로만 여겼었다. 목욕을 시키고 새 옷을 갈아입히기가 무섭게 가슴께가 흥건히 젖도록 침을 흘려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렇게 여길 수밖에 없었다. 소아과 인턴으로 있던 친구 상희가 아이가 좀 이상해 하며 고개를 갸웃거리기 전까지 그녀는 자신의 작지만 단란한 행복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더인디고 The Indi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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