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폐를 말하다] 집단의 이익, 사회화를 위해 정당화된 폭력

사진=더인디고
  • 윤은호의 ‘왜 자폐당사자는 죄송해야 할까?’ 일곱 번째 이야기
윤은호 더인디고 집필위원

[더인디고 = 윤은호 집필위원]  지금까지 길게 서술한 사회적 폭력 현상은 자폐당사자의 사회 부적응에 어떤 영향을 끼칠까? 지난 시간에 자세히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자폐당사자를 포함해 정신적 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대한민국의 일반학교에 진학한다면 그 순간부터 학교 폭력의 대상에서 벗어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다. 특히 자폐당사자는 사회적 소통 능력의 부재로 인해 다른 사람과의 차이가 또래 안에서 빠르게 드러나고, 이는 100% 학교 폭력으로 이어진다.

학교 폭력 경험은 많은 교사들이나 가해자 부모가 말하듯이 ‘성장하면서 한두 번씩 겪을 수 있는 경험’, 즉 어떤 사람의 사회화 과정이라고 할 수 없다. 집단폭력 피해 자체는 성장기에 반드시 쌓아야 하는 대인관계 경험의 축적으로부터 자폐당사자의 접근을 막는다. 사회 안에서 살아가야 하는 자폐당사자가 일반 학교에 들어가면, 사회적 손상으로 인해 발생하는 집단으로부터의 압력을 다루는 것이 매우 힘들기 때문이다.

또한 고등학교의 비인권적인 학칙과 교육 분위기도 정신적 장애인들에게는 적응하기가 힘든 장벽일 것이다. 휴대폰을 학교에 가지고 올 수 있지만, 그것을 제외한 소지품 제한이나 행동 제한 자체가 정신적 장애인에게는 견디기 어려운 일이다. 입시교육을 중점으로, 지속적인 학생 간 경쟁을 통해 높은 성적을 낸 사람의 대학 선발을 우선적인 목표로 삼고 있는 대한민국의 중등교육 특성상 반드시 발생할 수밖에 없는 결과이다.

현재의 중등교육 자체에서 정신적 장애인들이 동료(peer)와 라포(rapport)를 형성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며, 그로 인해 장애학생 대부분은 유의한 수준으로 학교 폭력을 겪게 된다. 그 결과 개인의 삶에는 낙인(stigma)이 발생하며, 깊은 트라우마가 부작용으로 발생한다. 이런 중등교육을 겪은 정신적 장애인은 사회적 활동을 회피하게 되고, 결국 사회적 손상의 대안 모색에 실패하는 경험을 낳는다. 그리고 이런 상황이 깊어지면 정신적 장애인들은 일본에서 보듯이 외출을 거부하는 히키코모리가 되기도 한다.

인지 능력이 높은 자폐당사자들이 학교 폭력으로부터 안전해지기 위해 특수학교로 진학하는 것이 당장의 폭력과 트라우마, 그로 인한 낙인을 막을 수 있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실제로는 자폐당사자 삶의 가능성을 가장 막는 길이 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런 현실 속에서 많은 고인지 자폐당사자들은 청소년기 동안 좀 더 나아지기 위해 폭력을 감수할 것인지, 아니면 그러한 폭력과 압박, 압력을 피하고자 도망칠지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두 가지의 방향 모두 어쩔 수 없이 이뤄질 수밖에 없는 일이겠으나 최선의(enhanced) 방향은 아니다.

그렇다면 최선의 방향을 찾기 위해, 자폐당사자의 통합교육과 일반 취업을 막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인 사회성 갖추기, 다시 말해 폭력으로부터의 위장이 가장 근본적인 문제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이러한 폭력의 원인과 영향을 설명할 수 있는 좋은 책이 나카노 노부코(中野信子)가 지은 〈우리는 차별하기 위해 태어났다〉이다. 원제가 〈사람은 이지메를 그칠 수 없다(ヒトはいじめをやめられない)>인 이 책은 집단 괴롭힘이 집단 구성원 일부의 일탈이 아니라 구성원의 문제라는 것을 자세히 설명해준다.

나카노 씨에 따르면 인간은 진화 과정에서 집단의 목표에 기여하지 않으면서 집단의 자원을 그저 소비하기만 하는 무임 승차자(free rider)를 배제하여, 집단의 이익과 생존 가능성을 높이려는 기제가 뇌에 장착되었다고 한다. 즉 인간의 뇌에는 배신자를 색출하는 모듈이 오래전부터 들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모듈과 집단을 지키려는 마음이 결합하였을 때 발생하는 것이 첫 번째로 ‘우리 집단’과 다르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에게 감정을 퍼붓는 배제나 혐오다. 둘째로, 제재를 가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에게도 ‘배신자 색출 모듈’을 작동해 ‘이상행동’을 보이는 사람을 제약하는 과잉제재(over-sanction)가 있다고 한다.

특히 (한국인도 비슷하겠지만) 일본인의 경우에는 세로토닌 수용체가 덜 발생하는 유전자를 가진 사람들이 더 많아 도전정신이나 위험에 대한 도전을 보이기보다 위험을 회피하고, 조심성을 보이며, 주변의 분위기에 맞춰 반응하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따라서 다른 국가에 비해 다른 모습이나 행동을 보였을 때 빠르게 과잉제지를 가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되기 쉬운 것이다.

또한 나카노 씨에 따르면 인간의 두뇌에는 과잉제재를 가했을 때 정의달성 욕구를 충족하거나 소속 욕구, 자아실현 욕구를 충족했을 때 도파민이 분출된다고 한다. 이러한 분출은 특히 집단의 일원이 되었을 때 발생하기 쉬우며, 그 결과에 따라 사고력이 떨어지면서 이성적 사고가 힘들어지게 된다. 따라서 교사도 자신을 학습 공동체의 일원이자 리더로 여길 때, 집단 내 사고의 영향을 받아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를 감싸는 구조가 되기 쉽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평범한 사람도 제도적 위치와 부여받은 역할에 따라 피해자로 전락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동안 사회 내의 폭력은 그러한 일을 일으키는 개인의 문제로 치부되어 왔다. 즉 사회 내의 폭력을 일으키는 대상은 개인이며, 그러한 일을 일으킨 사람들은 분류하여 처벌하거나, 또는 그러한 잘못을 일으킬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을 사회로부터 분리해 시설 등에 수용하는 것이 가장 옳다는 생각이 르네상스부터 시작되어 계몽주의의 성숙과 함께 강화되었으며, 이것이 극단적으로 발달하면서 우생학의 근본이 된다.

또한 루소는 〈사회계약론〉을 통해 사회를 구성할 수 있을 만한 정도의 법적 능력, 또는 지적 능력을 갖춘 사람만이 정치에 참여해서 그들이 논의하지 않은 상태에서 도출한 일반의지를 통해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연히 이 과정에서 자폐당사자를 포함한 정신적 장애인들은 사회계약의 주인공이 되거나, 소위 일반의지에 참여할 수도 없을 것이다. 신경 다양성을 가진 사람들은 그 자체로 독특하고 두드러지는, 일반의지에 포섭될 수 없는 별도의 인지 체계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카노 씨의 지적은, 사회 부적응이 개인의 능력 부족이 아니라, 인간이 구성하는 집단 속에서 발생한다는 점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인간의 능력과 사고가 아니라 사회 분위기나 사회 제도가 인간을 규제하고, 어떤 인간을 사회 부적응자, 폭력의 대상으로 만드는 행위는 굳이 북한이나 중국을 찾지 않더라도 4·16 세월호 침몰 사건, 5·18, 4·3항쟁 등의 대량 학살과 1990년에 윤석양의 폭로 이전에 안기부와 국방부,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계속되어왔던, 계속될 뻔했던 일상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겨우 촛불로 그 상태를 벗어나고, 세 번의 선거 승리를 통해 보통 국가의 면모를 세워나갈 수 있게 된 것뿐이다.

다시 말하자면, 개인을 집단과 사회에 적응하도록 하는 과정에서 그 폭력의 정당성과 무관하게 폭력이 발생한다. 그것은 사회화나 사회 적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고, 그러한 적응에 정신적으로 실패한 사람은 사회 부적응자로 이름 찍히거나, 때로는 범죄자가 되어 억울한 감옥살이를 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사회성을 함양하거나, 건전하고 명랑한 사회를 만든다는 것, ‘자유민주주의’ ‘법치주의’ 국가를 만든다는 것부터가 잘못된 것은 아닌지, 민주주의 국가의 국민인 우리는 지속해서 고민하고, 권력의 주체로서 그들을 감시해야 할 필요가 있다. [더인디고 The Indi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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