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미경의 컬처토크] 우리 안의 히든 피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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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SA 해리슨(캐빈코스터너) 부장이 '유색인종 화장실' 표지판을 부수고 있다
NASA 해리슨(캐빈코스터너) 부장이 '유색인종 화장실' 표지판을 부수고 있다 /시진=유튜브 캡처
차미경 편집위원
차미경 더인디고 편집위원

[더인디고=차미경 편집위원] 노예제가 폐지된 지 100여 년이 지난 이후에도 1960년대 미국 사회에는 흑인에 대한 차별과 혐오가 얼마나 끈질기게 남아 있었는지 우리는 영화 ‘그린북’이나 ‘헬프’ 등을 통해서 익히 보았다.

흑인만 갈 수 있는 숙소나 식당 등을 표시한 그린북이 따로 있던 시절의 이야기(영화 ‘그린북’)나 흑인과 백인은 결혼조차 할 수 없어 지난한 법정 투쟁까지 하면서 쟁취해야 했던 시절의 이야기(영화 ‘러빙’)는 물론, 학교 가기 위해, 투표하기 위해 목숨 걸고 투쟁해야 했고(영화 ‘셀마’), 백인과는 버스도 따로 타고 화장실도 따로 사용해야 했던(영화 ‘헬프’) 시절의 이야기까지… 영화가 보여준 인종 차별은 얼마나 숨이 막혔던가.

투표를 할 수 없고 교육을 받을 수 없는 제도적 차별보다 같은 화장실을 쓸 수 없다거나 숙소를 맘껏 선택할 수 없는 등의 일상에 밀접한 차별은 훨씬 더 치욕적이고 생생한 차별일지 모른다. 흑인이 겪어야 했던 차별들은 그 주어를 ‘장애인’으로 바꾸어도 일맥상통한다. 투표, 교육, 결혼, 이동과 편의시설에 대한 차별까지 어느 하나 장애인이 겪지 않는 차별이 있을까. 흑인에 대한 인종 차별을 다룬 영화가 장애인의 문제, 나의 문제로 섬세하게 와닿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흑인에 대한 차별이든 장애인에 대한 차별이든 그 차별의 이유나 행태가 거의 유사해서 차별당하는 입장에서 더 공감하게 된다. 특히 ‘화장실’ 이야기가 나오면 내겐 더욱더 생생한 문제로 다가오곤 한다. 입장 바꿔 상상해 보라. 세상에나 화장실을 맘대로 갈 자유가 없다니!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 어쩌면 가장 치명적이고 가장 치욕적인 차별이 될 수 있는 문제 아닌가.

영화 ‘헬프’와 ‘히든 피겨스’에 바로 이런 생생한 화장실 문제가 에피소드로 등장한다. 영화 ‘헬프’에서 흑인 가정부 미니는 백인 주인집의 화장실을 썼다는 이유로 해고되고 ‘히든 피겨스’에서는 분리된 화장실 문제로 결국 폭발하고 마는 주인공 캐서린의 에피소드가 나온다.

영화 ‘히든 피겨스’는 미 항공우주국(NASA)의 1962년 머큐리 계획(미국 최초의 유인위성 발사계획)에 참여했던 세 명의 흑인 여성 이야기를 다루었다. 천부적인 수학 능력을 가진 흑인 여성 캐서린 존슨, NASA 흑인 여성들의 리더이자 프로그래머 도로시 본, 그리고 흑인 여성 최초의 NASA 엔지니어를 꿈꾸는 메리 잭슨이 그들이다.

그 시절의 NASA는 우리의 기대만큼 그렇게 생각이 우주적이진 않았나 보다. 백인이 일하는 작업동과 흑인의 작업동이 따로 구분된 엄연한 차별의 공간이었다. 흑인은 유색인 전용 화장실을 사용해야 하고, 여자라는 이유로 중요한 회의에 참석할 수 없으며, 공용 커피포트조차 용납되지 않는 직장이었다.

어느 날 우주궤도 비행 프로젝트에 차출돼 백인 작업동에서 일하게 된 캐서린 존슨. 유인위성 발사라는 우주적 미션을 두고 미국과 러시아가 우주 전쟁이라 불릴 만큼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중차대한 시기였다. 거대한 프로젝트에 차출된 것은 캐서린에게 엄청난 기회였지만 그녀가 백인 작업동에서 겪어야 할 자잘한 차별은 그리 만만치 않았다.

백인 남자 직원들의 차가운 시선과 무시하는 태도는 그렇다 치고 유색인 전용 커피포트를 따로 써야 하는 것까지도 그럭저럭 참아 넘겼다. 그러나 그녀에게 가장 피부로 와닿는 불편함은 바로 화장실이었다. 쏟아지는 업무 중에도 그녀가 화장실을 가려면 800m나 떨어진 흑인 작업동까지 달려가 거기에 따로 마련된 유색인 전용 화장실을 사용해야만 했다.

바쁜 업무에 멀고 먼 화장실까지 달려야 하는 일상이 반복되고 업무 중 커피 하나도 유색인 전용 포트를 따로 사용해야 하는… 세상에 먹는 거, 싸는 거 가지고 유세 떠는 그 차별의 치사함이라니…

결국 비가 쏟아지던 어느 날 캐서린은 폭발해 버리고 말았다. 어쩐지 업무 파일들을 짊어지고 온통 비에 젖은 채 화장실까지 달리는 캐서린의 모습이 무척 위태로워 보인다 했다. 아니나 다를까. 팽팽해질 대로 팽팽해져 있는 일촉즉발의 그녀를 결국 부장 해리슨이 터뜨려 버린 것이다.

왜 찾을 때마다 자리에 없느냐고 해리슨(캐빈 코스트너)이 묻자 화장실 다녀오느라 그랬다고 대답하는 캐서린에게 해리슨은 “빌어먹을 무슨 화장실을 40분이나 다녀오느냐?”고 역정을 내며 묻는다. 그 말에 그만 펑 폭발해 버린 캐서린.

“이곳엔 화장실이 없습니다. 이 건물엔 유색인종 화장실이 없고 서관 전체에도 없어서 800m를 나가야 해요. 알고 계셨어요? 아프리카까지 걸어가서 볼일을 봐야 하는데, 사내 자전거도 사용 못해요. 생각해 보세요. 근무 복장도 무릎길이 치마, 힐, 심플한 진주 목걸이, 그딴 목걸이 없어요. 흑인에게 진주 목걸이 살 월급을 주긴 해요? 그런데 밤낮으로 개처럼 일하면서 모두가 만지기 싫어하는 커피포트로 버티고! 그러니까 죄송하지만, 하루에 몇 번 화장실에 가야겠어요!”

참아 왔던 말들을 울분에 차서 쏟아내는 캐서린의 모습도 시원했지만 이어지는 해리슨의 행동은 더 후련한 통쾌함으로 다가온다. 캐서린의 항변이 끝나기가 무섭게 화장실로 달려가 유색인 전용(colored)이라 써 붙인 푯말을 부숴버린 것. 그리고 해리슨이 선언한다.

“이제 유색인종 화장실은 없어! NASA에선 모두가 같은 색 소변을 본다.”

그렇게 NASA에 유색인 전용 화장실이 사라졌다.

이 영화는 NASA 최초 아프리카계 미국인 주임이 된 도로시 본, NASA와 미국 최초의 여성 항공 엔지니어 메리 잭슨, 천부적인 수학 능력으로 앨런 셰퍼트의 미국 최초 유인 우주 탄도 비행과 존 글렌의 우주궤도 비행,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과 우주 왕복선 계획 등에 참여한 캐서린 존슨을 숨겨진 인물들, 즉 히든 피겨스로 그렸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 속에서 그녀들에게 성별과 피부색을 뛰어넘어 능력을 먼저 보고 그녀들에게 기회를 주었던 맨 첫 사람들, 즉 해리슨과 질렌스키, 존 글렌 이 세 사람 역시 히든 피겨스로 꼽고 싶다.

해리슨은 앞에서 언급했듯 유색인 전용 화장실 푯말을 부숴 없애고 평등한 화장실을 선언했을 뿐 아니라 캐서린 존슨의 천부적 수학 능력을 인정하고 기회를 준 사람이다. 그리고 질렌스키는 메리의 엔지니어로서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녀를 엔지니어로 이끌어 준 첫 사람이며, 존 글렌은 IBM 컴퓨터의 계산 능력보다 캐서린의 능력을 끝까지 믿어 주었던 우주 비행사였다.

흑인 여성이라는 편견에 갇히지 않고 그녀들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인정해 주고 기회를 준 이 첫 사람들이 없었다면 NASA의 숨겨진 영웅들, 히든 피겨스는 끝내 나올 수 없었을지 모른다.

자, 그럼 1960년대 NASA 말고 이 시대로 시선을 옮겨 와 보자. 시대는 빠르게 변했지만, 인종 차별과 성차별이 여전히 존재하고 장애에 대한 차별도 여전하다. 편견과 차별의 견고한 벽을 부수고 평등한 자리를 내는 맨 첫 사람, 우리 안의 히든 피겨스는 누구인가.

우리에겐 여전히 히든 피겨스가 필요하다. [더인디고 The Indigo]

라디오 방송과 칼럼을 쓰고 인권 강의를 하면서 나름의 목소리로 세상에 말을 걸어왔습니다. ‘easy like Sunday morning...’ 이 노래 가사처럼 기왕이면 일요일 아침처럼 편안하게 문화를 통한 장애 이야기로 말을 걸어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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