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승준의 다름알기] 비가 와도 나가야 하는 이유

비 오는 날에 검정색 우산을 든 사람이 걸어가고 있다.
ⓒPixabay
안승준 더인디고 집필위원

[더인디고=안승준 집필위원]  잦은 태풍과 폭우로 요즘 출근길은 내게 평소보다 높은 수준의 집중력을 요구한다. 한 손에는 지팡이, 다른 한 손에는 우산을 들고 걷는 것쯤이야 30여 년 경력의 시각장애인에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빗소리나 바람소리가 주변의 소리 신호를 간섭하기 시작하면 내 머릿속 위치 정보는 조금씩 오류 메시지를 전송하기 시작한다.

발끝으로 파악하던 지리 정보는 흘러넘친 흙탕물과 휩쓸려 내려온 물건들로 인해 정확도가 낮아지고 때마침 뒤집힌 우산은 결국 모든 움직임을 멈추고 순간의 재난을 복구하는 비상사태를 선포한다.

며칠 전 출근길도 그랬다. 우산은 부러지고 옷은 흠뻑 젖고 기다리는 버스를 파악하는 것도 쉽지가 않았다. 발걸음을 늦추고 조심조심 주변을 살피면서, 원하지 않았지만 지나칠 정도로 시원해진 출근길로 마무리하였다. 부서진 우산을 정리하고 젖은 옷을 말리는 동안 괜한 웃음이 나왔다. 비 맞은 생쥐 꼴이 된 내 모습이 우습기도 했지만 그런 상황에서 여유 있게 웃고 있는 내가 기특하기도 했다.

처음 지팡이 보행을 시작했던 오래전에는 비가 내리는 날에는 무조건 택시를 이용했다. 이런저런 상황이 불편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그냥 귀찮고 두려워서 피했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차량이 연결되지 않거나 도와줄 사람이 없으면 외출 자체를 포기한 적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무작정 우산을 들고 나가본 거리는 생각보다 많이 다닐만했다. 조금 불편하긴 했지만 상상하던 만큼은 아니었다. 바람도 불고, 신발도 젖고 했지만 못 다닐 정도는 아니었고 다른 이들도 그렇게 걷고 있었다.

오늘 출근길도 그랬지만 체감하는 것만큼 엄청나게 더 많은 시간이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었다. 두 번, 세 번, 네 번… 비 오는 날의 외출을 늘려가면서 나의 지팡이 보행은 맑은 날의 자연스러움에 가까워지고 불어오는 바람과 살짝 스며드는 빗방울의 시원함까지 즐기는 단계가 되었다.

난 비 오는 날에도 외출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세상엔 맑고 좋은 날은 얼마 되지 않는다. 뜨겁게 더운 날도 있고 시리도록 추운 날도 있다. 비 오는 날도, 눈 내리는 날도, 바람이 부는 날도 있다. 다 겪어봐야 익숙해지고 익숙해져야 즐길 수 있다. 비 오는 날 씩씩하게 걸어본 사람이 또 다른 비 오는 날을 즐길 수 있고 눈밭에 굴러본 사람만이 겨울도 사랑할 수 있다.

자꾸 걸어보고 자꾸 나가봐야 어떤 날씨에도 편안하게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아파봐야 아픔을 아프지 않게 느낄 수 있고, 충분히 넘어져 봐야 다치지 않고 넘어지는 방법을 알 수 있다.

귀찮고 힘들다고 경험하지 않으면, 기억은 나를 외출 자체를 포기했던 처음으로 돌려놓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비가 와도 나가야 한다. 비 오는 날의 걸음걸이가 조금 더 익숙해질 수 있도록 또 다른 비 내리는 날을 기다려 본다. [더인디고 The Indi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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