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승준의 다름알기] 보들극장 가실래요?

5
294
보들극장 공연
배리어 프리 뮤지컬, 아빠가 사라졌다! (사진제공=보들극장)
  • 다른 이에게는 당연했던 일상의 한 조각이 나에게는 큰 장벽이었다.
  • 나의 갈증을 환희로 이끌어 준 배리어 프리 공연, 보들극장

목이 타들어 가는 뜨거운 여름날 생면부지의 낯선 이에게 시원한 얼음물 한 잔을 건네받아 본 적이 있는가? 빵 한 조각이라도 먹었으면 좋겠다고 느낄 만큼 굶주려 있을 때 어디선가 나타난 천사 같은 이에게 융성한 식사를 대접받아 본 적이 있는가? 갈증 해소나 배고픔의 해결, 그 이상의 아름다운 기억을 나는 갖고 있다.

장애인은 불편함을 넘어 불가능의 경험을 마주할 때가 많다. 다리가 불편한 이는 뛰지 못하는 것이, 시력을 상실한 이는 보지 못하는 것이 그러한 것들이다. 그런데 나의 장애와 직접 관련이 없는 것 중에도 넘어서지 못하는 벽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대학입시를 준비하던 때 충분하지 않은 점자교재들, 정류장과 동떨어진 곳에 있는 나를 두고 떠나 버린 버스들, 안 보이면 위험하다며 탑승을 거부하던 놀이기구들이 그런 것이었다.

다른 이에겐 너무나 쉬운 것이고, 조금만 노력하면 할 수 있으리라 여긴 것일수록 나는 더 욕구가 생겼다. 그러나 욕구가 커질수록 그 만큼 답답함이 짓누르곤 했다. 그 중 하나가 뮤지컬 관람이었다. 동반인과 함께 가면 어찌어찌 장면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도 있었지만 그건 함께 하는 이에게도 나에게도 부담이었고 아쉬움이었다. 열심히 설명해 주는 친구가 놓치는 장면들에 대해 미안함과 함께 그런 희생에도 감상이 온전히 채워지지 않는 헛헛함이 더 큰 문제였다.

몇 년 전 배리어 프리(barrier-free) ‘스튜디오 뮤지컬’을 처음 접했을 때의 느낌은 한 여름의 얼음물이었고 쓰러질듯 배고팠을 때의 만찬이었다. 시각장애인의 감상을 위한 설계와 장면 해설이 추가된 뮤지컬은 비로소 나에게 하나의 작품을 스스로 감상하고 누릴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다른 이에게는 당연했던 일상의 한 조각이 나에게는 큰 장벽이었다. 그때 그 벽이 무너지고 문이 열릴 때의 느낌은 경험해 보지 않은 이들은 영영 모를 나만의 환희였다.

얼마 전 그 배리어 프리 뮤지컬을 만들어 주신 분으로부터 책을 선물로 받았다. 그가 쓴 ‘아빠가 사라졌다!’였다. 뮤지컬 제목이기도 한 이 책은 시각장애인을 위한 뮤지컬이 만들어지기까지의 모든 순간들이 담겨 있었다. 그것은 나의 장벽이 환희가 되는 자세한 과정이 쓰여져 있었다.

보들극장 공연
배리어 프리 공연, 아빠가 사라졌다! 장면 (사진제공=보들극장)

생각보다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단순히 해설만 입혔다고 생각했던 나에겐 시작부터 충격이었다. 행동의 묘사나 배우의 표정 연기로 표현되던 장면들은 소리효과나 말소리로 바뀌고, 그 과정에서 시각장애인들의 감상의 몰입이나 극 전체의 어색함이 깨어지지 않게 철저히 계산되고 수정되었다. 해설이 나오고 대사가 나올 것인지 아니면 반대로 할 것인지, 구체적 설명이 필요한지 아니면 문학적 표현을 그대로 고수할 것인지, 해설의 주체는 장면해설자로 할 것인지 무대 위의 배우에게 녹여낼 것인지, 해설낭독은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할지 1인칭으로 할지… 고민은 끝이 없었고 시행착오를 거치는 시도는 계속되었다. 여러 장비가 활용되는 극의 특성상 컴퓨터에서 ‘운영시스템(OS)’의 업데이트 시간이나 소프트웨어의 돌발적 상황까지 고려했다. 모든 제작인은 배우의 애드리브에 대비하여 극이 진행되는 동안 무대를 향해 초집중 상태를 유지해야 했다.

책을 읽는 동안 그의 뮤지컬의 설계는 어쩌면 30여 년을 시각장애인으로 살아온 나의 삶보다 더 철저하게 디자인해서 적응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연극은 나의 삶을 아주 많이 닮았고 담아내고 있었다. 그는 이미 시각장애인의 모든 것을 이해하고 알고 있는 것만 같았다. 뮤지컬을 보는 동안 적어도 그는 노벨의학상 의사였고,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는 이를 위해 훌륭한 장치를 개발한 과학자이자 복지가였다.

누군가의 다름에 완벽히 다가가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일임을 새삼 느낀다. 수많은 다름이 공존하는 세상에서 우리는 가장 가까운 가족의 다름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극복하지 못할 때가 많다. 감수성이라는 이름으로 서로 다름을 말하며 이해한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반면 다름을 존중해달라고 바라는 만큼, 이를 삶에서 실천하는 이들에게는 감사하는 마음 또한 필요하다. 다름을 보편의 공간으로 끌어내는 것은 너무도 아름다운 일이지만 그것은 누구에게도 의무가 아니기에 행하는 이들의 마음은 정말 순고하다.

배리어 프리는 한국의 정서와 환경에 맞게 ‘보들극장’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나의 갈증을 환희로 끌어내 준 ‘보들극장’ 고은령 대표에게 이 글을 빌어 다시 한 번 깊은 감사의 마음을 표한다. 덧붙여 ‘보들극장’의 무한한 발전을 기원한다.

보들극장은 배리어 프리 공연을 뜻하는 이름이자 장애인 등 문화소외계층을 위한 맞춤 공연과 교육을 진행하며, 배리어 프리 문화 형성에 기여하고 있는 공연기획사이다.

승인
알림
66065336d3099@example.com'

5 Comments
Inline Feedbacks
View all comments
dkssud059@naver.com'
김주은
4 years ago

보들극장에 대해 새로운 관심을 가지게되네요

sohee4779@naver.com'
Joy
4 years ago
Reply to  김주은

오오 흥미로운 뮤지컬이네요!

Admin
조성민
4 years ago
Reply to  김주은

저도 안승준 집필위원님의 글을 받고 보들극장이라는 배리어프리 공연 기획사 측과 통화하며서 알게되었습니다. 다야성과 차이의 존중은 관심부터인 것 같습니다~

gukmo72@gmail.com'
leevom
4 years ago

보들극장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어요. 우리 주위에는 따뜻한 사람들이 참 많은 것 같습니다.

디산박
4 years ago

글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