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석의 낮은 시선으로부터] 소설을 읽는 맛과 쓰는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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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책들이 방 안에 가득 쌓여 있다 / 사진 = 픽사베이
낡은 책들이 한 사람조차 지나가기 어려울 정도로 방 안 가득 쌓여 있다 / 사진 = 픽사베이

[더인디고=이용석 편집위원]

소설을 읽는 맛

휠체어 림을 미는 손끝이 곱기 시작하고 발끝으로 스미는 한기에 모골이 송연해지면 겨울을 맞이하는 채비를 마친 느낌이 든다. 겨울은 얼음처럼 짱짱한 차가움으로 손끝과 발끝으로 전해져 오고 그 살가운 기운은 내 몸이 기억해 어쩔 수 없이 맞이한다. 머리맡에 켜켜이 쌓인 읽지 못한 책들이 뿌옇게 종이먼지를 날리는 이른 새벽, 새끼손가락 한 마디쯤 열린 창문 틈새로 기세등등한 동장군의 입김처럼 바람이 스민다.

이용석 편집위원
이용석 더인디고 편집위원

고단한 현대사와 몸을 부딪치고 깨지면서 살아온 황정은의 ‘순자들’은 오늘도 그 삶의 무게를 내려놓지 못했을 것이고, 강화길의 화자들도 자신들만 아는 세상의 진실을 이야기 하는 시간을 더없이 끈끈하고 눅진한 서글픈 감정의 골 깊이 나를 몰아넣곤 한다. 정세랑의 안은영은 어느 틈에 책에서 튀어나와 특유의 시니컬한 웃음을 쏟아내며 비비탄 총을 쏘아댄다. 그렇게 소설을 읽는 맛은 새로운 세상과의 조우이며, 아주 오래 전에 읽었던 소설 속 화자들과 뒤섞여 또 다른 세상으로 현현한다.

소설을 읽는 맛은 지친 여행을 하다 맞닥뜨린 남도의 허름한 식당에서 마주한 백 가지 상차림을 마주한 느낌이다. 읽는 행위는 소담하게 담긴 음식을 맛보는 행위와 닮았다. 그 맛이 달거나 쓰더라도, 또 짜거나 싱겁거나 시거나 맵더라도 그 정해진 맛 안에서 별스럽고 아린 세상의 맛을 느끼듯 나는 책을 열면 펼쳐지는 아연함에 기가 질리면서도 그 형형색색의 풍경에 사로잡히곤 한다.

소설을 쓰는 맛

나는 오십이 넘은 지금까지도 소설쓰기를 동경한다. 등단 이후 먹고 살자고 일찌감치 소설쓰기를 그만두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소설쓰기를 꿈꾼다. 그래서 내게 쓰는 행위는 문학적일 수밖에 없으며, 설사 허세라 해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소설은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세상을 서사를 통해 드러내는 일이어서 별로 대수로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는 때로는 역사를 뒤집고, 때로는 세상을 바꾸기도 한다. 그래서 소설쓰는 맛은 세상의 한끝에서 맞닥뜨리는 짜릿한 쾌감이 된다. 악의(惡意)와 부딪치는 순간은 쓰거나 맵고, 선의(善意)와 만날 때는 달고 시다. 두 감정이 뒤섞이고 뭉쳐지면 세상 어디에서도 맛볼 수 없는 서사가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이제 소설의 시대는 끝이 났다고. 짧고 자극적인 내용으로 생산되어 빠르게 퍼지는 세상의 무수한 단발마를 그 특유의 느려터진 소설쓰기로는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는 예언은 어쩌면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렸다. 소설쓰기는 느리지만 쌓이고 저장되며, 이미 아는 것을 옮겨 적는 일이 아니다. 소설쓰기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을 만들어 혁명을 꿈꾸지만 무수한 단발마들은 한때 쏟아지는 소낙비처럼 잠깐 세상을 적시고는 증발한다.

말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좀 더 솔직히 말하면, 소설을 읽는 맛과 소설을 쓰는 맛은 같다. 읽는 행위는 소설 안으로 뛰어 들어가 기꺼이 서사를 끌어안는 것이고, 쓰는 행위는 읽기 위해 책을 펼치는 사람을 자신이 꿈꾸는 혁명의 대열로 안내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소설 한편을 써낼 때마다 자신과 타인, 세상에 대한 무지를 경험하고 앎을 누리지 못한다면 우리는 왜 소설을 읽고 쓸까?

황정은, 강화길, 정세랑 그리고 수많은 소설쟁이들이 열악한 노동조건과 쓰는 짓의 고단함 속에서도 소설쓰기를 멈추지 못하는 이유는 한편씩 쓸 때마다 그전엔 사유해본 적 없는 무지와 앎을 마주하게 되고 이에 대해 고민하는 과정이 주는 희열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말할 수 있는 것을 말하는 자유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욕망의 끝단에 서서 낯섦과 두려움 사이를 곡예하듯 넘나들던 그 짙고 알싸한 ‘맛’ 때문이 아니겠는가.

[더인디고 THEINDI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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