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쏘Young의 쏘Diverse] 드러나지 않거나, 드러나지 않게 하거나

0
209
표면에 다양한 줄무늬 모양의 색이 칠해져 있다 ⓒUnsplash
표면에 다양한 줄무늬 모양의 색이 칠해져 있다 ⓒUnsplash
  • 소소:소수의 소리③

[더인디고=김소영 집필위원] 

지난 설 연휴에 영국의 전설적인 밴드 퀸의 보컬인 프레디 머큐리의 일생을 그린 영화, ‘보헤미안랩소디’가 TV를 통해 방영되었다. 나는 퀸의 노래에 열광하거나, 드라마 장르의 영화를 즐겨보지는 않지만, 나흘의 연휴를 지루하지 않게 보내기 위한 방편으로 이 영화를 시청하기로 했다. 그런데 나의 영화나 음악 취향과는 별개로 영화를 시청하는 동안 마음 한 편이 불편했다. 영화에 등장하는 동성 간 키스 장면이 모자이크 처리된 탓이었다.

김소영 더인디고 집필위원
김소영 더인디고 집필위원

며칠 뒤 그 방송사의 행태는 성소수자 인권단체와 공익법률가들에게 뭇매를 맞았다. 극장 상영판을 보지 않아서 명확히 알지 못하지만, 주인공이 동성인 연인과 키스하는 장면은 아예 삭제되었다고 한다. 마치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해서는 안 되는 장면인 것처럼 방송사는 동성 간 키스 장면을 말끔히 지워버렸던 것이다. 인권단체는 ‘동성애를 폭력, 흡연과 동일하게 유해한 것이라고 보면서 임의로 편집한 행위는 명백하게 성소수자를 차별한 것’이라며 성명을 발표하고 국가인권위원회에 차별 진정을 제출했다.

해당 방송사에서는 ‘온 가족이 함께 보는 연휴 기간 저녁 시간에 편성된 점을 고려해 직접적인 스킨십 장면을 편집’한 것뿐이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이 해명을 받아들이기엔 해당 방송사에선 그간 폭력적이고 자극적인 프로그램들이 가감 없이 방영되어 물의가 된 적이 많았다. 어쩌면 방송사의 이번 편집으로, 당시 영화를 시청한 사람들은 동성애를 비정상적인 것, 보이지 않아야 하는 것으로 다시 한 번 잘못 인식하게 되었을 지도 모른다.

무언가 존재함에도, 드러나지 않거나 혹은 드러나지 않게 하는 것, 비가시화(invisibility)라고 한다. 잠시 장애인단체에서 일했던, 캐나다 유학생이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캐나다에서는 장애인 당사자를 정말 많이 볼 수 있거든요, 근데 한국에서는 정말 보기 어려웠어요. 이룸센터 근처에 와서야 볼 수 있었어요.” 1980년대, 길거리 부랑자들과 장애인들을 강제로 시설로 보내 수용한 이유는 보이지 않았으면 하는 그들의 존재를 지우기 위한 국가의 일방적인 비가시화 조치였지만, 어쩌면 그 조치는 우리 국민들의 암묵적인 지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장애인이나 성소수자 등의 존재를 지워내는 것뿐 아니라, 사건이나 현상에도 비가시화는 적용된다. 일명 ‘직장 갑질’, 직장 내 성추행, 학교폭력, 가정폭력, 혐오 범죄 등, 소수/약자를 대상으로 하는 다양한 범죄도, 오래전에는 드러나지 않음으로써 (혹은 드러나지 않게 함으로써) 마치 대단한 문제가 아닌 것처럼 축소되거나, 아예 인지조차 되지 않기도 했다.

며칠 전 서울시장 보궐선거 토론회에서, 한 후보자는 때마침(?) 이런 발언을 했다. “퀴어축제는 도심 외곽에서 진행되어야 한다.” 성소수자를 세간의 시선에서 지워버리려는 비가시화 조치가 국가의 역할인 것처럼 말이다. 인간의 모든 권리는 중요하다. 그렇다고 권리간의 경중을 따질 수 없는 것은 아니다. A의 보지 않을 권리는, B의 존재를 인정받을 권리보다 중요하지 않다. A가 사회적으로 기득권이고 B가 사회적 약자라면 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사회는 변화하고 있는 듯하다. 전에는 논쟁조차 되지 않았던 일에 당사자는 더 이상 숨지 않는다. 기꺼이 분노하며, 많은 사람들은 공개적으로 지지하고 연대를 모색한다. 장애인권운동과 여성인권운동이 활발히 일어나던 때, 장애여성은 ‘여성’, ‘장애인’이라는 이중적 차별의 당사자임에도, 그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2000년 초반, 그녀들은 스스로를 가시화함으로써 유엔장애인권리협약에서 독립적인 조항을 만들어냈다.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강력 범죄가 단순한 강력범죄가 아닌 ‘여성혐오범죄’로 취급되기 시작하고, 성소수자 지우기 조치에 우리가 분노하는 것은, 계속 누군가가 ‘가시화’하기 위해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큰 혐오는 지우는 것, 보이지 않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계속해서 우리를 보이게 하는 것이고, 기꺼이 드러내는 것이다.

[더인디고 THEINDIGO]

한국장애인단체총연맹 선임, 2014년부터 장애청년 해외연수 운영, UNCRPD NGO 연대 간사 등을 하면서 장애분야 국제 활동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자유롭게 글도 쓰며 국제 인권활동가로 살고 싶다.
승인
알림
6628a3f1cba0e@example.com'

0 Comments
Inline Feedbacks
View all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