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미영의 오늘] 내 방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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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방에 책상과 컴퓨터 그리고 왼쪽에는 책꽂이가 있다 ⓒ픽사베이
▲빈 방에 책상과 컴퓨터 그리고 왼쪽에는 책꽂이가 있다 ⓒ픽사베이

[더인디고=조미영 집필위원] 

조미영 집필위원
조미영 더인디고 집필위원

딸을 내보냈다. 서울에서 인천으로 출퇴근하는 건 아무래도 무리였다. 나는 ‘독립’이라 말했지만, 딸은 ‘강제분리’라며 새로운 곳에서의 생활이 달갑지만은 않아 보였다. 젖은 낙엽으로 엄마 곁에 딱 붙어살 거라고 노래 부르던 딸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전셋집을 구하고 세간살이를 들였다. 제법 사람 사는 공간으로 모양새를 갖췄다.

“너 이렇게 살다가 좋은 사람 생겨서 결혼하면 좋겠다.”

남자에게 관심 없어 보이는 딸에게 슬쩍 말했더니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살면서 나는 단 한 순간도 혼자 살아본 경험이 없기에 자신만의 공간을 갖는 딸이 부러웠다. 워낙 험한 세상이라 안전상의 문제가 걱정스럽기도 했지만, 불특정 다수를 잠재적 범죄자로 여기는 것 같아 이내 거둬들였다.

저녁을 먹으며 남편의 ‘라떼는 말이야’가 늘어졌다.

“아부지는 대학 졸업하고 맨몸으로 서울 올라왔다 아이가. 친구 기숙사에서 하룻밤 자고 다음 날 회사 직원 소개로 하숙집엘 갔지. 빈손으로 온 아빠한테 주인이 얇은 이불하고 베개를 주더라. 아부지는 그렇게 빈 몸으로 시작했어도 미래에 대한 고민은 있었지만 일상생활에 대해서는 걱정이 안됐는 데, 우리 딸내미 내보내는 건 와 이리 불안하노?”

그러면서 아침에 출근할 땐 오지 않던 비가 내려 퇴근 후 빨래가 젖어 있는 걸 볼 때는 서글펐다고 했다. 자취생의 비애를 딸은 모르고 살아 다행이라면서도 신경이 많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부녀는 심란해했지만 나는 신이 났다. 딸 방은 이제 내 차지가 되는 것이라. 혼자 살아본 적도 없지만 오롯이 나만의 방을 가져 본 적도 없는 내겐 좁은 공간에 나만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 생각만 해도 설렜다. 늘 식탁이 나의 책상 역할을 했으니 이제 식탁도 그의 본분에만 충실하면 되는 것이다.

정식 직원으로 첫 출근하는 딸을 보고 싶었다. 근무 첫날 분위기와 직장 동료들은 어땠는지 듣고도 싶었다. 남편과 아들을 서울 집에 두고 나와 딸은 인천에서 ‘첫날밤’을 함께 했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성실을 강조했다. 원칙은 지키되 가능한 되는 방향으로 일을 하도록 말해줬다. 잔소리만 느는 것 같아 더 이상 말은 아꼈다. 평소 꼼꼼하고 자기 일을 잘해나가던 딸의 언행으로 보아 직장 생활을 잘 못 하진 않을 거라 믿고 싶었다.

출근하는 딸은 독서실 다닐 때의 추레함이 사라지고 아이보리색 셔츠와 검은 정장 차림이 내 눈에 참 예뻤다. 나와 덩치가 비슷했는데 그동안 살이 빠져 딱 보기 좋았다.

“너 퇴근했는데 빈 집보다 엄마가 있으면 좋겠지?”

내가 먼저 말하니 당연하다며 좋아하는 딸을 핑계로 빨리 오라는 남편의 채근을 외면했다.

“나 없이 좀 살아보란 말이야.” 나는 계속 웅얼거렸다.

딸이 출근한 사이 가까운 공원을 산책했다. 바다가 보고 싶었으나 썰물이라 드넓은 갯벌이 뻐끔거리며 숨을 쉬고 있었다. 다음엔 송도의 물 때를 잘 맞춰 와야겠다. 그래도 서해는 동해만큼의 감동은 덜하지 싶다. 바다 빛깔의 맑고 선명함은 확실히 다르기에. 딸 덕분에 나홀로 산책의 호사도 누렸다.

퇴근한다는 딸의 연락을 받고 일찌감치 집 앞 버스 정류장에 나가 기다렸다. 오가는 사람들의 표정이 모두 행복해 보였다. 역시 세상은 내 마음이 투영되나 보다. 딸은 과거의 그 버릇이 남아 있었다. 학교 다닐 때 집에 들어오면서 엄마를 부르고는 가방을 멘 채 나를 쫓아다녔다.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조잘대는 딸이 때로는 귀찮아서 ‘요점만 정리해서 간단히 말하라’고 하면 극적 상황 전달이 안 된다고, 굳이 장황하게 얘기하던 딸이었다. 시험을 잘 못 본 날은 눈물을 글썽이며 나를 난감하게 했다.

“내가 엄마한테 동생 몫까지 다하려고 노력하는데 잘 안돼. 엄마! 난 왜 수학을 못 해? 엄마 아빠는 수학 잘해서 은행도 다녔는데 난 누굴 닮은 거야?”

전혀 무관한 수학과 은행의 연관성이 뭔지, 가끔은 얘가 쇼하는구나 싶을 정도로 뛰어난 연기력을 보이곤 했다. 장애가 있는 동생 몫까지 자식 노릇을 다 할 거란 생각은 언제부터 했는지, 그런 말 하지 말라고 나는 딸을 나무라기도 했다.

첫날이라 다른 직원이 일하는 것을 지켜보기만 하면서 딸은 그동안 부모 밑에서 얼마나 편하게 잘 살았는지 깨달았다고 했다. 민원인의 안타까운 개인사를 들어도 적합한 서류 없이는 처리해 줄 수 없어 그걸 설명하는 게 쉽지 않다고 했다. 중국어와 영어를 한국어 사이에 쓰면서 대화하는 걸 보면 우습기도 했지만 내색할 수는 없었단다. 고개를 돌려 피식 웃었다니 나도 웃음이 나왔다. 겨우 하루 근무하고 온 딸은 한 달 정도 일한 사람처럼 사연이 많았다. 동료의 개인적인 질문에 얼버무려 대답하니 엄마처럼 꼬치꼬치 캐묻는 직원도 있었단다.

“나 같은 사람이면 분명 인정머리 없는 사람은 아닐 거여, 친하게 잘 지내라.”라고 조언했다. 딸은 사생활 캐묻는 사람 별로라며 샐쭉했다.

딸을 두고 서울로 왔다. 남편은 반겼고 아들은 덤덤했다. 딸의 빈방을 보고 남편은 허전하다고 했지만 나는 음흉한 미소를 숨기지 않았다. 당장 내 물건들을 잘 정돈된 책상 위로 갖다 놓았다. 겨우 믹스 커피 한 잔 높이 치켜들고 나의 공간을 자축했다. 나만의 공간에서 밤새워 뭐라도 할 것 같았던 나의 기세는 며칠간 이어진 잦은 운전과 신경 씀으로 인해 졸음에 밀려났다. 우선 잠부터 자자 싶어 침대에 누웠다. 금방 곯아떨어질 줄 알았는데, 옆방에서 쉽게 잠들지 못하는 아들의 중얼거리는 소리가 제법 크게 들렸다. 딸아이가 아들의 소음으로 잠을 설친 적이 많았음을 느꼈다. 그래도 본인 잠 못 잔 것보다 동생이 잠을 못 자서 힘들 거란 말을 자주 했던 심성 고운 우리 딸. 이제 혼자 살게 됐으니 성가시게 하는 동생 없는 집에서 잠도 잘 자고 편하게 지냈으면 좋겠다.

알랭이 그의 행복론에서 로마 경찰서장이 가장 행복하다고 했던 글이 생각난다. 바빠 보이는 딸의 직장생활이 일하는 기쁨과 보람을 느끼며 행복을 가져다주길 바란다.
딸이 집에 오면 비켜줘야 할 반쪽짜리지만 내 방이 생겨서 나도 참 좋다.

[더인디고 THEINDIGO]

가족과 함께 하는 일상에서 행복을 찾습니다. 그 행복을 나누면서 따뜻한 사회를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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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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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m72@naver.com'
이은미
2 years ago

따님 출근 축하 축하드립니다.
새로운 공간이 생긴 것도 축하드려요.
첫 출근하고서 쏟아낸 이야기들을 잘 들어주셔서 따님이 힘이 부쩍 쏫아나셨겠어요^^
도란도란 대화할 수 있는 딸이 있어서 부럽네요.

간절하게 원하던 게 생겼을 때, 기쁨에 취해 꿈꾸웠던 일들을 못 하긴 하더라고요.ㅎㅎ
내 공간이 생긴 설레임 맘껏 누리셔요.
우아하게 차 마시며 글 쓰시는 모습 상상되네요^^

따님이 동생 잘 챙기는 예쁜 마음 누나였네요.
가족 모두 건강하고 행복한 일들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cooksyk@gmail.com'
김서영
2 years ago

따님이 어쩜 꼭 조미영샘을 닮았구먼요 ^^
그러하므로 직장생활 잼나게 잘 할 것이라 믿어의심치 않습니다 명진이의 새로운 시작 응원합니데이♥

usu80@hanmail.net'
심규민
2 years ago

따뜻한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