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석의 낮은 시선으로부터] 이유 없이 사랑하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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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파제 등대와 모래사장으로 밀려오는 파도 ⓒ이용석
▲방파제 등대와 모래사장으로 밀려오는 파도 ⓒ이용석

[더인디고=이용석 편집장]

여행 끝에 선 밤과 바다

이용석 편집위원
더인디고 편집장

여행 내내 분 바람끝이 매서웠다. 바다를 헤집는 바람의 손놀림이 거칠어지고 다급해질수록 포말의 두께는 퍽이나 두툼해지고 색깔마저 짙어졌다. 곧 어둠이 내리면 밤과 바다는 수평선 끝마디에 일직선으로 만나 서로를 확인하게 되겠지. 그렇게 밤과 바다는 매일 밤 조우하며 서로의 존재를 확인한다. 여행은 미지의 낯선 곳을 향한 설렘과 호기심이 얽힌 기대로 시작하지만 돌아오는 길 끝에서 새삼 확인하는 것은 눈에 익숙한 산마루이거나 바다 혹은 밤이다. 그래서 낯선 여행은 없다. 낯선 길 끝에 잠잠히 숨죽인 지난날을 되짚어 오늘을 확인하는 익숙하고 진부한 과정일 뿐이다. 되돌아오는 발걸음이 버거울 만큼 무거워도 그 무게마저 견뎌야 한다는 떠름한 자극은 애이듯 아프면서도 떨치기 어려운 아쉬움이며 달디 단 유혹이다.

언제나 멈춰 선 자리에서 보이는 것은 밤과 바다의 만남처럼 지루한 반복의 일상적 관계이다.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는 일이 살이(生)의 옹골지고 단단한 마디는 아닐 텐데도 멀어지는 관계는 멀뚱히 바라볼 수밖에 없는 아쉬움의 세계다. 아쉬움은 사랑하는 마음이 깊을수록 크기 마련이고 사랑의 깊이가 깊을수록 아쉬움의 크기는 넓고 웅숭깊다. 그래서 사랑하는 마음과 아쉬움은 밤과 바다의 만남처럼 지루한 반복이지만, 짙고 옅음은 다를 수밖에 없다.

내가 사랑하는 것들

나는, 동틀 무렵 깨어나 헛헛한 빈속에 태우는 그 아득한 담배 한 대를 사랑하고, 일에 치이고 사람에 부대끼다 지친 몸으로 귀가해 잠들기 전에 마시는 뜨거운 커피를 사랑한다. 또 머리맡에 쌓인 읽지 못한 책들의 모서리를 매만지며 잠드는 그 아득하고 몽환적 찰나를 나는 사랑한다. 때때로 역전승을 거두는 키움 히어로즈 선수들을 사랑하고, 우연히 올려다보게 되는 여름 한낮 뜨겁게 달궈진 먼 하늘을 사랑하며, 세상을 일그러뜨리는 특별한 힘을 가진 맑고 투명한 소주를 사랑한다. 영화 겨울왕국의 울라프와 칸의 여왕 전도연 배우를 사랑하며, 운전하며 힐끔거리던 물비늘 번득거리는 동해의 먼 바다 풍경을 사랑한다. 잠 못 이루는 아득한 새벽, 잘 지내냐는 안부를 묻는 사람들의 정겨운 문자거나 한때는 지척에 두고 싶어 안달났지만 이제는 오래된 기억의 흔적으로만 남는 것들의 풍문조차도 나는, 사랑한다.

이제 여행은 끝났다. 바람이 서럽도록 불어대던 여행지에서의 봄밤도, 바다와 밤이 만나는 순간 들끓던 흰색 포말의 아우성도 이제 아련한 기억으로만 남았다. 바다는 매일 밤을 만나지만 바라볼 뿐 다가서지 않는다. 아슴한 수평선을 사이에 두고 둘은 그렇게 서로의 정령(精靈)만을 애무할 뿐 가지려고 욕심부리지 않는다.

바다와 밤이 만나는 이유는 바다가 밤을 기다렸기에 가능했던 것처럼 이제 이유 없이 사랑했던 수없이 많은 것들을 기다리는 일만이 남은 듯하다. ‘너’와 ‘내’가 오롯하게 마주 선 타자(他者)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부터 아쉬움 대신에 기대가, 미련 대신에 기다릴 수 있는 마음의 견고한 방패가 생겼으면 좋으련만.

사랑의 유통기한

사랑에도 유통기한이 있다는 사실을 중늙은이가 다 되어서야 깨닫는다. 따지고 보면 이유 없는 사랑에도 사연이 있을 테고,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조차 손익이 분명해진다는 것쯤은 안다. 새벽 첫 담배의 알싸한 맛이 비려지거나 첫 잔의 소주가 역하게 입안을 맴돌면 유통기한이 다가온 것이다. 난로에 녹는 올라프를 보고도 슬프지 않거나 역전 홈런을 맞는 키움 히어로즈의 경기를 보면서도 분통이 터지지 않으면 사랑은 끝났다. 서로를 맞바라보는 눈빛에서 생경함이나 지루함이 느껴진다면 이제 자리를 털고 뒤로 한걸음 물러나야 한다.
이유 없이 사랑했다면 멀어지는 것조차 이유를 찾을 필요는 없다. 쓴 소주 한잔이거나, 색바랜 책이거나 겨울왕국의 올라프까지 내가 이유 없이 사랑하는 무수한 ‘너’를, 유통기한 지나버려 남는 아쉬움이야 어쩔 수 없겠지만 아쉬움과는 무관하게 한 걸음쯤 거리를 뒀을 때 어쩌면 다시 이유 없이 사랑할 수 있는 유통기한이 새로 시작될지도 모른다. 수평선에 갇힌 채 밤을 기다리는 바다의 기다림을 이제, 알겠다.

[더인디고 THEINDIGO]

오래 전에 소설을 썼습니다. 이제 소설 대신 세상 풍경을 글로 그릴 작정입니다. 사람과 일, 이 연관성 없는 관계를 기꺼이 즐기겠습니다. 그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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