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승준의 다름알기] 전봇대와 부딪혀도 괜찮아

0
160
횡단보도 앞에 있는 음향신호기와 인도에 있는 전봇대/사진=더인디고
▲횡단보도 앞에 있는 음향신호기 ⓒ더인디고
안승준 집필위원
안승준 더인디고 집필위원

[더인디고= 안승준 집필위원] 화창한 5월의 봄날!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나름의 아들 된 도리를 하기 위해 어머니 아버지를 뵈러 가던 길이었다. 아침저녁 하루에도 몇 번씩 지나던 길에 갑자기 예상치 못한 장애물이 나타났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장애물이 있는 쪽으로 내가 돌진했다.

늘 가던 길이라 방심하고 잠시 딴생각을 했던 것이 원인이었다. 순간적으로 전봇대와 진한 스킨쉽을 나누고 나의 얼굴엔 그 뜨거운 사랑을 기념하는 마크가 새겨졌다. 큰 상처가 난 것도 아니고 어디가 부러진 것도 아니어서 아무렇지 않게 길을 걸었지만 찌그러진 얼굴을 보고 놀라실 어머니 생각에 걱정이 밀려왔다.

역시나 단번에 알아채신 어머니는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펴시며 내 상처의 연유와 내가 느낄 고통에 대한 안타까움을 실제 내가 겪었던 사건 그리고 내 아픔의 3천 배는 될 만큼의 마음으로 느낀다는 신호를 보내셨다. 애써 아무렇지 않다는 표현을 보여드렸지만 안쓰러움의 무게가 덜어지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아무렇지 않은 것은 진심이었다. 처음 특수학교에 입학했을 때 나의 필수품 중 하나가 연고였다. 보이지 않는 눈으로 혼자 돌아다닌다는 것이 익숙하지 못했던 내게 예민한 감각이 있을 리 없었다.

부딪히고 넘어지고 깨지고 혹이 나고 부서지고 내 피부 여기저기는 끊임없이 연고의 도움이 필요했다. 다른 친구들은 멀쩡히 잘만 다니는데 기둥과 모서리는 늘 나에게만 불시에 나타났다. 오늘도 터지고 내일도 다치고 하면서 양호 선생님과 누구보다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그런데 내게 진정 필요한 것은 연고보다 마음의 위로였다. 한 번 부딪힐 때마다 서러운 마음이 복받쳐 올라왔다. 안 보이는 것도 슬픈데 그 눈 때문에 여기저기 부딪히면서 살아야 하는 내 팔자가 억울하고 서러웠다. 반복해서 깨지고 다치고 억울하고 또 슬펐다.

한 통, 두 통 연고의 빈 통은 늘어가고 내 몸 여기저기에 상처가 늘어갔다. 내 몸 구석구석 반창고의 흔적이 없는 부분이 없을 만큼 다쳤을 때쯤 부딪히지 않고 다치지 않는 날이 다치는 날보다 많아지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면 연고와 단짝으로 지낸 시간이 그리 길었던 것도 아니었다. 상처 조금 생겼다고 그리 서러워할 것도 없었다.

내가 부딪히며 다녔던 것은 원초적으로 내 눈이 보이지 않아서라기보다는 보행 훈련을 덜 받았거나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서였다. 다른 친구들은 잘 다니는 길을 혼자만 부딪히며 다닌다는 것은 슬퍼할 일이라기보다 조금 더 연구하고 공부해야 하는 상황에 가까웠다. 다친 부위도 며칠 지나면 대체로 원래로 돌아오는 별것 아닌 작은 것들이었다. 다만 아직 나의 마음 상태가 보이지 않는 작은 다름을 너무나 큰 좌절로 보고 있는 것이 문제의 본질이었다.

넘어지는 것도 공부가 안되는 것도 배가 고픈 것도 기분이 울적한 것도 괜스레 다 눈 때문이라 여기고 자신을 불쌍함의 틀에 가두고 눈물을 뚝뚝 흘렸던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청승도 그런 청승이 없었다.

넘어져 세상 무너진 듯 우는 것은 서너 살 때 해야 하는 기본적이고 기초적인 인간의 과제였다. 열다섯 살도 넘은 반청년이 슬퍼할 일은 아니었다. 어린아이 때 그랬던 것처럼 난 넘어지고 또 넘어지고 하면서 그런 일은 별것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오늘 전봇대와 접촉하면서 내가 슬프지 않았던 것은 눈이 보이지 않는다고 세상 무너질 듯 좌절할 것이 아님을 확실히 알기 때문이다. 난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딴생각을 했고 운이 나쁘게 그 상황에 전봇대와 마주쳤을 뿐이다.

내 얼굴에 작은 상처가 난 것은 그리 기분 좋은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엄청 아파할 것도 아니다. 다음에 조금 더 조심하면 되고 상처는 며칠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원래로 돌아올 것이다.

살다 보면 작은 넘어짐이나 부딪힘을 겪는 일이 많다. 평탄한 길이나 내리막을 걷는 것처럼 늘 편안하면 좋겠지만 삶이 그렇지 않다. 돌부리에 넘어지거나 갑자기 장애물을 만나기도 한다. 그렇지만 먼 길을 걸어가는 데 있어서 그런 것은 큰 장애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다음번 마주할 다른 장애물을 부딪치거나 넘어지지 않고 걸어갈 힘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넘어지면서 넘어져도 아프지 않을 수 있는 마음가짐을 배운다. 부딪히고 깨지면서 상처가 쉽게 아물리라는 것도 알게 된다. 작은 상처에 큰 의미를 부여하면서 아파하지 않기를 바란다.

[더인디고 THEINDIGO]

승인
알림
6606dbab7590c@example.com'

0 Comments
Inline Feedbacks
View all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