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승준의 다름알기] 강북 03번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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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북 03 마을버스
강북 03 마을버스/ⓒhttps://www.youtube.com/watch?v=ZboiyzT13Zs&t=49s
안승준 더인디고 집필위원
안승준 더인디고 집필위원

[더인디고= 안승준 집필위원] 익숙하지 않은 약속 장소가 정해지면 난 큰 고민 없이 지하철 노선도를 살피고 목적지와 가장 가까운 지하철역을 찾는다.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여러 가지 옵션을 고려하여 버스를 탈지 지하철을 탈지 자가용을 운전할지 고민하겠지만 나에겐 그런 선택이 주어지지 않는다.

눈이 보이지 않으니 자차로 이동하지 못하는 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버스를 선택지에 넣지 못하는 것은 기회비용에 있어서 굉장한 손해로 다가올 때가 많다.

대학 다닐 때쯤 언젠가는 자주 다니던 경복궁역에서 신촌역까지의 경로가 버스를 타고 가는 것이 지하철을 타고 가는 것보다 몇 배는 빠르다는 것을 알고 나서 굉장히 억울했던 적도 있다. 그렇지만 친구와 함께하던 몇 번을 제외하면 난 그 이후에도 매번 지하철을 이용해서 빙빙 돌아가는 경로를 택해야만 했다.

어떤 번호의 버스인지 구별도 못하거니와 안내방송이 나오는 정류장이라 하더라도 방송에 나오는 그 번호의 버스가 정차한 수많은 버스 중 몇 번째인지를 고민하다 보면 이미 버스는 떠나가고 만다. 운 좋게 원하는 버스를 타더라도 정류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하차하게 되면 난 한동안 내 위치를 파악하느라 지하철을 타고 돌아가는 것보다 못한 결과를 만들기도 한다.

번호를 읽어 주는 것도 타야 할 버스를 구분하는 것도 약간의 기술력을 적용하거나 규칙을 정하면 해결될 문제 같은데 20여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난 같은 문제를 고민하고 결국 지하철을 택하는 선택을 반복하고 있다.

나름 꽤 노력도 하고 건의도 해 보지만 될 듯 될 듯 되지 않는 결과들을 쳇바퀴 돌 듯 받아들면서 어느 순간 난 지하철만 타야 하는 사람이라는 현실적 굴복을 해 버린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스 아니면 접근할 수 없는 곳은 어쩔 수 없이 타긴 하는데 그중 한 곳이 출퇴근 길이다.

다행히 내가 이용하는 정류장은 그리 많은 버스가 서는 것도 아니고 해서 대체로 한산하고 여유롭게 탈 수 있긴 한데 그렇다고 해도 매번 그런 것은 아니다. 역시나 정류장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 세워진 버스를 타야 할 때도 있고 방송이 나오지 않아서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야 할 때도 있다.

그날도 그랬다. 탑승까지는 완벽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내려야 할 학교 정류장을 이미 지나쳐 가고 있었다. 부지런히 내 상황을 알리고 기사님께 내려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갑자기 차를 멈춘 기사님은 나보다 더 당황하신 듯 보였다. 아침 출근길, 일주일에 몇 번씩 만나는데 내 하차 지점을 잊으신 게 오히려 미안하신 듯했다.

내 실수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자주 만나는 시각장애인에 대한 배려가 없었다는 자책 그 정도는 그럴 수 있다고도 생각했다. 그런데 기사님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시동을 끄고 손수 나를 안내하려 차에서 내리고 계셨다. 괜찮다는 몇 번의 만류에도 꿈쩍 않고 내 팔을 붙잡으셨다.

다행히 마침 출근하던 동료 선생님의 도움으로 기사님이 버스를 버리는 촌극까지는 벌어지지 않았지만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하는 아침이었다.

우리는 이미 여러 가지 첨단기술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그런 것들로도 아직은 복잡한 대도시의 버스를 시각장애인이 편리하게 탈 수 있게 만드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것 같다. 그렇다고 전혀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함께 살고 있기 때문이다.

기술로 채울 수 없는 부분은 사람이 채울 수 있다. 기술이 완벽해지는 동안 그 작은 틈은 우리가 서로서로 메워주면 된다.

그 일이 있고 나서 며칠이 지난 오늘 아침 버스는 정류장에서 멀찍이 차를 멈추었다. 줄지어 기다리던 사람들은 한꺼번에 빠른 걸음으로 차를 향해 뛰어갔지만 난 정확한 위치를 모르기에 그럴 수가 없었다. 그때 손을 내밀어 주신 분은 다름 아닌 기사님이셨다.

난 또 한 번 사람의 도움으로 기술이나 정책이 해내지 못한 버스에 오를 수 있었다. 매일 아침 인간의 따스함으로 버스를 진짜 대중교통으로 되돌려 주시는 강북 03번 기사님들께 감사드리며 세상의 모든 버스가 강북 03번이길 바라본다.

[더인디고 THEINDIGO]

한빛맹학교 수학 교사, "우리는 모두 다르다"를 주장하는 칼럼리스트이자 강연가이다. 밴드 플라마의 작사가이자 보컬이다. 누구나 불편하지 않은 세상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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