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혼걷이굿 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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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unsplash
불꽃/ⓒunsplash

그녀가 일곱 살 되던 해에 여자는 웬 사내아이를 등에 업은 채 아버지를 쫓아 대문 안으로 들어왔다. 아버지는 들고 온 체크무늬 트렁크를 댓돌 위에 올려놓으며 마루참에 걸터앉아 있던 그녀의 귀에 속닥거렸다. 얘야, 오늘부터 저 분이 네 엄마시란다. 그녀는 커다랗고 검붉은 아버지의 얼굴을 피해 고개를 모로 꺾어 사내아이의 목에 찍힌 푸른 반점만을 말끔히 올려다봤다. 여자가 사내아이를 마루에 내려 눕혔다. 너무 하얘서 속이 들여다보일 듯 맑은 얼굴을 지닌 사내아이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사내아이의 코에 송글송글 맺힌 땀을 여자는 손바닥으로 훔쳐냈다. 다시 아버지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동생 종석이다. 나이는 같다만 생일이 넉 달 빠른 네가 누나란다. 그날은 위암을 소화불량이라며 호렴을 한 움큼씩 집어먹던 엄마가 죽은 지 꼭 일 년째 되는 날이기도 했다.

부장이 갑자기 새된 목청으로 고함을 질렀다.

“허튼 수작하지 마, 널 절대로 보낼 수 없어!”

핸들을 단단히 부여잡은 손등에 암팡진 힘줄이 뱀의 비늘처럼 번들거린다. 그의 옆얼굴 너머 차창 밖으로 건물들이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고 있다. 여자는 어금니를 지그시 사려 물고 손바닥에 괸 땀을 무릎에 문질러 닦아내며 체념하듯 입술을 달싹인다.

“미쳐버리고 싶어.”

그러나 그녀의 목소리는 엔진음에 파묻혀 가뭇없이 사라진다.

“뭐라구?”

부장이 짜증스럽다는 듯 양미간을 좁히고 눈살을 찌푸린다. 어뜩, 그를 쳐다보는 그녀의 눈빛에 새파랗게 날이 선다.

“제발 그런 얼굴 좀 하지 말아요. 하얗게 질린 저 손톱 좀 봐. 제발 속도를 줄여요. 당신도 잔뜩 겁에 질려 있잖아. 답답해서 미치겠단 말이야.”

다짜고짜 그에게 달려들어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그녀가 표독스럽게 악다구니를 퍼붓는다. 머리털을 휘어 잡혔으면서도 그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흡인력에 빨려가듯 점점 더 깊게 가속페달을 밟아대고 있다. 백 삼십, 백 사십. 속도계 바늘이 빨간색 경고 눈금에 가까워지자 뜨겁게 달아오른 엔진의 폭발음이 차 안 가득 팽팽하게 차오른다. 손톱만한 점으로 떠밀려오다 차창 앞에서 부챗살처럼 펴지던 도로는 이내 다시 실금처럼 좁아져 마침내 잘 벼린 칼날이 되어 여자의 지친 의식을 저며낸다.

날, 정말 사랑한다면 당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세요. 당신의 손이 닿기 전에는 잠옷 끈을 먼저 푼 적이 없다는 그 정숙한 아내와 아이들을 당장 밤거리로 쫓아내란 말예요. 단란하고 행복한 가정이란 미혹(迷惑)에 얽매인 채 인생의 절반을 훌쩍 넘긴, 그 대단찮은 목숨조차 내놓으려 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사랑을 지킬 수 있겠어요? 사랑이란 세상의 금기(禁忌)를 깨는 용기라고 말한 사람은 바로 당신입니다. 하지만 금기를 깬다는 것은 곧 혁명이죠. 혁명은 현실을 변화시키려는 사람들의 욕망을 먹고 자랍니다. 그 대상이 한낱 허상(虛像)이거나 결코 이룰 수 없는 꿈, 혹은 한 줌의 바람이라도 사랑의 운명은 결코 달라지지 않아요. 그래서 사랑에 빠진 자들은 모두 레닌이고 체 게바라, 모택동 혹은 호치민이에요.

차에서 내린 여자는 현기증이 일어 손으로 이마를 짚는다. 갑작스럽게 멈춘 속도감 때문일까, 땅을 딛고 선 종깃굽이 후들거린다. 무려 두 시간이 넘도록 그녀를 태운 채 차를 고속으로 운전했던 그는 담배를 태워 물고는 데꾼한 눈을 비빈다.

“젠장, 피곤해 죽겠어.”

담배 필터 끝을 쥔 그의 손끝이 가늘게 떤다.

[더인디고 THEINDIGO]

오래 전에 소설을 썼습니다. 이제 소설 대신 세상 풍경을 글로 그릴 작정입니다. 사람과 일, 이 연관성 없는 관계를 기꺼이 즐기겠습니다. 그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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