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미경의 컬처토크] 그에게 그 삶의 고삐를 허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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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피넛 버터 팔콘’의 한 장면_사진 왼쪽부터 잭과 타일러가 뗏목 앞에서 웃고 있다. ⓒ네이버
▲영화 ‘피넛 버터 팔콘’의 한 장면_사진 왼쪽부터 잭과 타일러가 뗏목 앞에서 웃고 있다. ⓒ네이버

[더인디고=차미경 편집위원]

삶의 진정한 주인은 누구인가, 그 삶의 고삐는 누가 쥐어야 하는가…

차미경 편집위원
차미경 더인디고 편집위원

영화 <피넛 버터 팔콘>이 던지는 질문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사람들의 평처럼 힐링하기보다는 필링해야 하는 영화다. 영화가 던지는 질문에 단순하게 답할 수 있으려면 힐링도 필요하지만 필링(peeling), 즉 그동안 굳은 마음의 각질을 한 꺼풀 벗겨내고 바라보는 일이 더 필요한지도 모른다.

영화 <피넛 버터 팔콘(The Peanut Butter Falcon, 2019)>은 주인공 잭(잭 고츠아전 분)과 타일러(샤이아 라보프 분)가 특별한 인연으로 만나 동행하며 자신을 찾아가는 로드무비이며 따뜻한 버디무비다. 다운증후군을 가진 주인공 잭이 자신에게 붙여준 또 다른 이름이 바로 ‘피넛 버터 팔콘’. 직역하면 ‘땅콩버터 매’쯤 되겠다. 달콤하면서도 강인한, 자기가 가장 좋아하고 바라는 것의 조합으로 자신의 새 이름을 만든 남자. 뭔가 매력적이지 않은가.

이 영화를 소개하는 대부분의 기사나 후기가 잭을 설명할 때 ‘다운증후군을 앓는’이라고 표현했는데 우선 이 글을 통해 정정하고 싶다. 잭은 다운증후군을 앓는 환자가 아니다! 그저 다운증후군을 가진 한 사람일 뿐이라는 점을 말이다!
다운증후군을 가진 잭은 부모에게 버려져 주정부가 의뢰한 시설에 맡겨졌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가 맡겨진 시설은 일반 장애인시설이나 보육시설이 아닌 노인요양시설이다. 생각해 보라. 젊고 건강한 사람이 또래가 아무도 없는 노인들 사이에서 기약 없이 지내야 한다니! 그 자체만으로 이미 부적응의 조건과 이유가 충분하지 않은가. 그래서 그는 이미 도망 위험군으로 분류된 감시대상이다. 갇힌 일상에서 잭의 유일한 돌파구는 자기가 좋아하는 레슬러 솔트워터 레드넥의 비디오를 무한 돌려 보는 것.

그러다 결국 잭이 사고를 치고 말았다. 룸메이트 칼 아저씨의 도움으로 팬티 한 장만 걸친 채 감행한 탈출에 드디어 성공한 것이다. 시설에서 도망쳐 그의 우상 솔트워터 레드넥의 레슬링 학교가 있는 에이든에 가는 것이 그의 목표다. 그러나 계획은 원대했으나 팬티 한 장의 혈혈단신으로 감행하기에는 너무나 멀고도 험난한 여정. 그 먼 여정을 함께한 것이 바로 타일러였다.

타일러는 자신의 실수로 사랑하는 형을 잃은 아픔을 가진 사람이다. 그 상처 때문에 세상에서 겉돌고 어업권을 두고 다투던 이들과의 불화로 방화범이 되어 도망자 신세가 되었다. 잭은 시설로부터, 타일러는 자신을 쫓는 이들로부터 도망치다 둘 다 도망자의 처지로 만났다. 가족이 없다는 것과 둘 다 도망자라는 공통점을 빼고는 서로 닮은 구석이 아무것도 없는 두 사람이 에이든과 플로리다라는 동향의 목적지를 향해 가는 여정에서 친구가 되어가는 과정을 그렸다.

그 여정을 통하여 잭은 보호와 돌봄의 대상이었던 시설수용인으로서의 자신이 아니라 자신 안에 숨은 강하고 용감한 영웅, 피넛 버터 팔콘을 찾아낼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그럴 수 있도록 북돋아 준 것은 바로 길동무 타일러. 수영을 못 하는 잭에게 수영하는 법을 가르쳐 준 것도 그였다. 지금껏 잭은 수영을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저 수영할 기회가 없었던 사람일 뿐이란 걸 타일러가 보여준 셈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비장애인인 타일러가 장애를 가진 잭을 돌보고 구원하는 이야기인가?… 은근슬쩍 이렇게 반문해 보고 싶을 때쯤이면 자연스레 알게 된다. 잭 안에 숨은 피넛 버터 팔콘을 일깨워준 것이 타일러라면 타일러 안에 응어리진 상처를 어루만져 주고 다시 새로운 삶을 꿈꾸게 만든 건 잭이라는 사실을… 하여 도움과 돌봄이 일방적이어야 하는 건 진정한 친구가 아닌 것이다.

시설을 탈출한 잭을 찾아 나선 시설직원 엘리너(다코타 존슨 분)는 그런 의미에서 아직은 잭의 친구가 아니었다. 잭을 다시 찾았을 때 엘리너의 눈에 비친 잭은 물가에 내놓은 어린아이처럼 위험하고 불안하기만 하다. 그녀에게 잭은 오로지 돌봐주고 책임져야 하는 요보호 대상일 뿐.

▲영화 ‘피넛 버터 팔콘’의 한 장면_ 사진 왼쪽부터 앨리너와 잭, 타일러가 뗏목을 타고 여행을 하고 있다. ⓒ네이버
▲영화 ‘피넛 버터 팔콘’의 한 장면_ 사진 왼쪽부터 앨리너와 잭, 타일러가 뗏목을 타고 여행을 하고 있다. ⓒ네이버

엘리너가 잭과 타일러의 동행에 뜻하지 않게 합류하면서 셋이 함께 탄 뗏목 위의 장면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잭에게 레슬링 훈련을 하자며 물속에 머리를 집어넣어 보라는 타일러를 보고 엘리너는 기겁을 하며 연신 ‘안 돼요!’를 연발한다. 또 배고프지 않다고 해도 혈당이 떨어지면 안 된다면서 잭에게 굳이 이런저런 먹을 것을 강권한다. 그 모습을 보다 못한 타일러가 그녀에게 말한다.

“머저리라고 그만 불러요.”

그런 말은 평생 써본 적도 없다고 항변하는 엘리너에게 타일러가 덧붙인다.

“사람들이 잭을 머저리라고 부를 땐 아무것도 못 하는 놈 취급할 때에요. 대놓고 머저리라고 안 부르면 뭐해요? 그렇게 취급하고 있는 걸.”

타일러가 지적하듯 누구도 ‘장애인’이라고 부르며 대놓고 조롱하진 않는다. 그러나 장애가 있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 무조건 도움받고 돌봐야 하는 존재 취급하며 동행이 아닌 보호를 당연시하는 사회라면 그것으로 이미 충분한 모욕이고 조롱이 아닐까.

보호와 돌봄이라는 명목으로 누군가 대신 이끄는 고삐에 의지해 사는 삶이어야 한다면 어쩌면 그 자체로 생에 대한 모욕이 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생의 주인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이어야 하니까. 내 생의 결정권은 그 누구에게도 양도할 수 없는 권리니까. 따지고 보면 삶이란 거칠게 날뛰는 야생마 같아서 그 위에 올라탄 그 누구의 삶도 안전하지 않고 예측불허이기는 마찬가지다. 그런데 왜 누군가의 삶은 자신의 고삐를 타인에게 넘겨줄 것을 종용받는가.

안전하지만 단조로운 시설수용인으로 사는 것과 롤러코스터처럼 위험하지만 변화무쌍한 피넛 버터 팔콘으로 사는 것 중에 잭에겐 어떤 것이 더 행복했을까.

이쯤에서 우리는 다시 물어야 한다. 잭이 올라탄 삶의 주인은 누구인가? 그 삶의 고삐는 누가 쥐고 있는가? 잭이 그의 이상적 자아 피넛 버터 팔콘으로 살 수 있기 위해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이 질문을 다운증후군을 가진 실제 당사자인 잭 고츠아전이 빛나는 연기로 물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답해야 할까.

우리가 그 답을 하기까지 너무 멀고 험난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더인디고 THEINDI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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