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혼걷이굿 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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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사진=픽사베이
첫눈/사진=픽사베이

지은 지 이십 년도 훨씬 넘었다던 5층 아파트는 바지랑대처럼 기우듬하게 서 있다. 차가 아파트 광장으로 들어서자 시멘트로 이겨 바른 생채기들이 502동이라 쓰인 글자 위로 깨진 유리창의 잔금들처럼 선명하게 드러난다. 바람이라도 불면 금방 풀썩 내려앉아 버릴 듯 위태롭다.

그의 차가 주차장을 빠져나갈 때까지 여자는 망연히 아파트 꼭대기 층만을 올려다본다. 맨 오른쪽 끝인 그녀의 집 베란다 창문은 견고한 어둠에 잠겨있다. 이틀 전에 햇볕이 제법 따사로워 내다 널었던 빨래들이 얼어붙었는지 처음 널었던 상태 그대로 굳어 바람에도 꼼짝도 하지 않는다.

여자는 문득 이틀 전부터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서늘한 혼돈에 사로잡히며 어깻부들기를 움츠렸다. 딱히 뭐라고 꼬집어 설명할 수 없는, 마치 눈감고도 다닐 만큼 익숙한 길을 걷다가 사위를 둘러보면 전혀 낯선 곳을 허랑하게 헤매고 있었다는 허탈감이 일었다. 이 길은 뉴욕 할렘가의 축축한 뒷골목이거나, 티벳의 어느 가파른 산길일지도 모른다는 막막함. 어쩌면 이 낯선 거리를 배회하다 지쳐 넝마처럼 쓰러져도 아무도 실종을 눈치채지 못할 것만 같은 두려움이 등골을 파고들었다.

여자는 뜨겁게 달아오른 얼굴을 손바닥으로 쓰윽, 문지르고는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빛부스러기 한 점 없는 먹먹한 어둠만이 시야를 가로막았다. 불현듯 그 무녀의 정체를 확인하지 않고 발길을 돌렸어야 했다는 후회가 썰물처럼 그녀의 휑한 가슴속으로 밀려들어왔다.

시외버스 터미널의 을씨년스러운 풍경은 그녀가 떠나왔던 십 년 전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빽빽하게 들어찬 차부의 낡고 더러운 버스들과 삶은 달걀, 박카스, 오징어 따위의 군것질거리를 파는 구멍가게와 약국, 난삽한 여체 사진으로 가득한 주간지나 신문들이 꽂힌 가판대 등이 승객들의 분주한 걸음들과 뒤엉켜 몹시 혼잡스러웠다. 여자는 일부러 오전 11시발 완행버스 맨 끝자리를 찾아 앉았다. 분홍색 차표를 바투 쥔 손끝에 자꾸 땀이 차올랐다. 어쩌면 이른 귀갓길에 오르는 동네 사람 누군가가 자신을 알아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그녀는 애써 차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부릉, 버스가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치자 희뿌옇게 흐린 하늘에서는 진눈깨비가 떡가루처럼 흩날리기 시작했다. 첫눈이었다.

고향집 골목은 진눈깨비로 팥빙수처럼 질퍽하게 젖어있다. 눈에 익은 치자색 대문 옆에 꽂힌 손목 굵기만한 대나무 장대 끝에 매달린 흰 천이 분분히 내리는 진눈깨비 속에서 만장(萬丈)처럼 펄럭였다. 울렁거리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여자는 사개가 맞지 않아 삐긋이 열린 대문 안으로 주춤대며 들어섰다. 디귿자로 된 남향집인 집안에서는 산사(山寺)에서나 맡을 수 있음직한 알싸한 향내가 풍겨오는 듯했다.

마당 왼편으로 장독대가 여전히 남아있었다. 약 일 미터 높이로 돌을 쌓아 시멘트를 들이부어 평평하게 고른 장독대 위에는 크고 작은 장독들이 서 있었다. 여자는 반가운 마음에 저도 모르게 다가가 마당 쪽 가깝게 있는 종두리의 불룩한 배에 손을 얹었다. 볕도 들지 않았는데 종두리는 사람의 체온처럼 따뜻했다. 예전에도 장독대 밑은 볕살이 마춤하게 들었다. 한 겨울에도 여자는 동생 종석을 끌고 나와 장독대 밑에 앉아 공깃돌 놀이를 하곤 했다.

[더인디고 THEINDI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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