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혼걷이굿 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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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내린 건물 입구에 한 남자가 서 있다./사진=픽사베이
어둠이 내린 건물 입구에 한 남자가 서 있다./사진=픽사베이

얼마를 그렇게 앉아 있었을까. 담장 너머로 저녁볕이 들비추자 댓돌 위에 누운 그녀의 그림자가 한껏 키자람을 했다. 이제 곧 땅거미가 내릴 것이다. 노인에게 동자(童子)라고 불린 무당도 더 이상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방문을 닫아걸어 여자를 외면해 버린 것도 아니었다. 여전히 한 뼘 남짓 열린 방문 안에서는 은은한 향내가 무당의 옅은 숨소리와 함께 흘러나왔다. 노인은 무당의 지청구에 어지간히 얼이 빠졌는지 마당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마당가를 휘돌던 침묵이 어둑살과 막 조우할 무렵이었다. 무당의 목소리가 마지못해 입을 여는 듯 가느다랗게 들려왔다.

“예서 살던 여인네는 이미 죽었소. 애옥살이였던 속세를 용케도 벗어났다는 게요. 이제 그네와 손은 어떠한 연(緣)도 없단 거요. 내, 재주 읎으나 어금니를 아금받게 사려 물고 살풋 내뱉는 말투와 혀끝을 입천장에 붙여 섞어내는 코맹녕이 목소리에서 손의 살(煞)을 느꼈소. 눈앞을 가로막은 발 그림자 땜시 손의 관상을 세세히 볼 수는 읎지만 짙은 눈썹 밑에 우멍하게 큰 여러냥(눈)과 실팍한 비들기통(젖통)을 보니 에먼 떼두리(총각) 쥑일 상판이란 소릴 소싯적엔 듣기도 했겄소. 허지만 염려 마소. 살이란 게 어디 여자 소관입디까? 되옹박 팔자, 모진 살 풀어줄 남정네 만나면 봄눈 녹듯 사라지는 게 살이라고 한다면, 염려 마오. 손과 연리지(連理枝)로, 부부연이었던 떼두리가 명도 다하지 못하고 죽음서 모두 제몫으로 붙들어 갔으니께.”

여자의 몸이 사시나무 떨듯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분명 추위에 떠는 것이 아닌데도 그녀의 턱은 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올 정도로 와들거렸고, 두 손은 찻잔을 댓돌에 떨어뜨려 박살을 낼만큼 사정없이 흔들렸다. 떨지 말아야 한다고 이를 악물었으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간질 발작을 일으키듯 입에 버캐를 문 채 몸을 웅크리고 버르적거리고 있는 여자의 눈에 어느새 나타났는지 불목하니 노인의 성깃한 백발이 부유스름하게 비추었다.

아파트 출입구 옆 화단 위에 검은 비닐부대 덩어리가 나뒹굴고 있다. 너덜너덜 찢긴 옆구리에서 라면봉지, 과일 껍질, 수챗망에서 건져 올린 음식 찌꺼기 따위들이 내장처럼 흘러나와 있었다. 또 누군가 어둠을 틈타 갖다 버린 모양이었다. 아침이 되면 아파트에 한바탕 소란이 일어날 것이다. 쓰레기를 버린 작자를 찾겠다고 부녀회 총무라는 여자는 뚱뚱한 살피듬에 비닐 슬리퍼를 따각거리며 집집마다 초인종을 눌러대며 설치고 나댈 것이 뻔했다. 꼭 범인을 잡아야 한다니깐, 대체 어느 여편네인지 걸리기만 하면 그 손목쟁이를 작신 분질러 버리고 말꺼야. 총무 여자는 만나는 사람마다 붙들고 게거품을 물며 씨근덕거리겠지. 총무 여자의 다부진 결심에도 불구하고 여자는 지금껏 범인이 잡혔다는 소문을 듣지 못했다. 여자는 계단 앞에 서서 어둠이 눈에 익숙해질 때까지 기다리며 새벽잠을 설칠 생각에 건짜증이 곤두선다.

여자가 계단을 막 오르려는데 계단참의 컴컴한 구석에서 언뜻 미세한 움직임이 감지된다. 그녀의 목덜미로 까스스한 소름이 인다. 쥐새끼인가? 그녀는 발소리를 죽이며 계단 밑으로 주춤 다가선다. 그때 어둠 속에서 검은 그림자가 그녀를 덮칠 듯 왈칵 달려들었다. 화들짝 놀란 여자는 몸을 곱송그리며 벽에 등을 붙이고 섰다. 너무 놀라선지 분명 비명을 지른 듯한데 그녀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창문에 들비친 희끄무레한 빛살에 어른대던 그림자의 정체가 조금씩 드러난다. 열다섯 정도 되었을까, 앳되어 보이는 소년이 비틀거리며 그녀에게로 지칫거리고 있었다.

[더인디고 THEINDIGO]

오래 전에 소설을 썼습니다. 이제 소설 대신 세상 풍경을 글로 그릴 작정입니다. 사람과 일, 이 연관성 없는 관계를 기꺼이 즐기겠습니다. 그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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