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석의 낮은 시선으로부터] 선거, 공정(公正)한 세상을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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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과 정의의 연신상 /사진=픽사베이
▲법과 정의의 여신상 /사진=픽사베이

[더인디고=이용석 편집장]

이용석 편집위원
더인디고 편집장

바야흐로 정치의 계절로 접어들고 있다. 아니다. 정치라기보다는 내년 3월로 예정된 대통령 선거를 준비하는 정치꾼들의 이합집산이 분주할 뿐이다. 우리는 곧 대통령이라는 국가 권력의 정점에 서고자 하는 사람들의 욕망이 대중들의 꿈과 부딪쳐 뭉쳐지고 나눠지며 마침내 흩어지는 과정을 겪게 될 것이다. 5년의 한 번씩 견뎌내야 하는 선거라는 술래잡기는 새로운 세상을 상상케 해 다분히 몽환적이어서 대중들이 저마다의 절실한 꿈을 꾸는 달콤한 시간이기도 하지만 사람들의 기대가 얽히고설키는 혼란한 시기이기도 하다. 공정한 세상에서 살고 싶은 사람들의 욕망은 항상 선거 때가 되면 들끓기 마련이고 그에 화답하듯 권력에 서고자 출사표를 던진 많은 정치인들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공정을 들먹인다.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공정(公正)의 의미는 지나치게 짧고 간명하다. 공평(公平)하고 올바름(正義). 그러니까 어느 한쪽에도 치우치지 않아야 하고 또 정의로워야 한다는 의미겠다. 풀어보니 꽤나 복잡하고, 게다가 공평과 정의라는 두 낱말이 서로 중첩적이고 순환적이어서 혼란스럽기까지 하다. 그런데, 공정을 이야기할 때면 언젠가 본 듯한 기시감에 사로잡히곤 한다.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

그렇다. 2017년 5월 문재인 대통령 취임사에 담긴 구절이다. 그는 2012년 9월 민주통합당 대통령후보 수락 연설에서 “보통사람들이 함께 기회를 가지는 나라, 상식이 통하고 권한과 책임이 비례하는 사회, 힘없는 사람에게 관대하고 힘 있는 사람에게 엄격한 잣대가 적용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공평과 정의, 즉 공정을 국정운영의 근본으로 삼고자 했던 말이다. 미국의 정치철학자 존 롤스의 ‘정의론’을 닮았다.

‘공정으로서의 정의’라 흔히 불리는 롤스의 정의론은 기본적 자유에 대해 동등한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제1원칙과 사회적·경제적 불평등이 모든 사람에게 이익이라는 합당한 기대와 모든 사람에게 개방된 직위와 직책에 갈 기회가 있어야 한다는 조건을 제2원칙으로 삼아 출발한다. 정당한 불평등을 인정한 셈인데, 이 정당한 불평등을 정의의 제2원칙을 둔 이유는 아마도 분배방식을 최소 수혜자에게 최대 이득이 돌아갈 수 있도록 하는 ‘차등의 원칙’으로 조정하고 균형을 맞출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차등의 원칙을 제1원칙인 기계적 평등이 제2원칙인 정당한 불평등을 어떻게 수용할 것인지를 끊임없이 고민한 롤스의 주장이 바로 우리나라에서 ‘기회의 평등과 과정의 공정, 그리고 결과의 정의’라는 정치적 구호로 나온 셈이다. 그래서일까, 문재인의 구호는 성공했지만 구호를 바탕으로 한 정치는 실패한 듯하다. 실패했기 때문에 공정은 되살아나 내년도 대통령 선거의 가장 핵심적인 정치적 구호로 부활하였다.

실패한 정치적 구호는 용도 폐기되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이 구호가 되살아난 이유는 정당한 불평등만 강조되는 세상에서의 공정은 여전히 매력적인 정치적 구호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그렇기 때문에 또 다시 실패할 것이다. 애초에 공정은 세상의 꿈이지 달성하고자 하는 목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일찍이 우리에게는 공정한 사회를 꿈꾸었던 혁명가들이 있었다. 백성이 주인 되는 나라인 대동 세상을 꿈꾸었던 정여립이 있었고, 지역차별에 항거했던 홍경래가 있었으며, 홍길동의 율도국을 꿈꾸었던 입진보 허균도 있었다. 이들이 꿈꾸는 세상이 정말로 공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반역이었다면 그 실패가 애석할 일이겠지만 그럴 일은 없다. 이들이 꿈꾸었던 것은 공정한 세상이 아니라 공정한 세상의 왕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만일 핏자를 자르는 역할을 맡게 되었는데, 어떤 조각이 내 몫이 될지 모른다면 나는 심혈을 기울여 똑같은 크기로 자르려고 애쓸 것이다. 당연하게도 내 몫이 다른 누구의 몫보다 작은 조각이길 원치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게 핏자를 자를 수 있는 역할과 어떤 조각을 선택할 수 있는 권한까지 주어진다면 내 몫을 가장 크게 자르게 될 것이다. 이렇듯 공정은 누가 핏자를 자르는 역할을 하던지 자신 몫의 조각이 무엇인지 몰라야 비로소 실현될 수 있다. 핏자를 자르는 역할을 맡기 위해 대통령 후보로 나서는 수많은 정치인들은 자신들이 자른 조각 중에서 자신의 몫을 알 수밖에 없다. 안다는 것이 바로 권력이기 때문이며, 그래서 공정은 늘 공정하지 않은 권력의 몫으로만 남는다. 아마, 롤스의 고민도 바로 이 지점에서 맴돌았을 것이다. 우리는 다시 공정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 몫의 핏자조각을 자를 누군가를 선택하기 위해 투표장으로 나서게 되겠지. 누구에게 내 몫의 핏자를 자를 칼을 쥐어줄 것인가 하는 선택의 고민만 남은 셈이다.

[더인디고 THE INDIGO]

오래 전에 소설을 썼습니다. 이제 소설 대신 세상 풍경을 글로 그릴 작정입니다. 사람과 일, 이 연관성 없는 관계를 기꺼이 즐기겠습니다. 그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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