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승준의 다름알기] 맹학교 입학하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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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복도/사진=픽사베이
학교 복도/사진=픽사베이

[더인디고 = 안승준 집필위원]

안승준 집필위원
안승준 더인디고 집필위원

처음 맹학교에 입학했던 중학교 1학년 학년 초의 어느 날이었다.

수업 시간에 와서는 안 되는 신호가 내 뱃속 깊은 곳에서 오고 있었다. 수업 시간에 교실을 벗어나는 것은 학생의 도리가 아니라고 굳게 믿던 난 왕성한 신진대사를 억누르기 위한 식은땀 나는 인고의 시간을 택했다. 그러나 그 인내의 시간은 45분 수업시간을 절반도 채우지 못하고 ‘항복 선언’으로 끝이 났다.

선생님께 최대한 죄송하다는 표정을 짓고 내가 구사할 수 있는 가장 공손한 말투로 나에게 교실을 벗어나야만 하는 사정이 발생했다는 의사를 표현했다. 다행히 선생님께서는 별다른 꾸지람 없이 친절하게 복도 중간쯤 위치한 화장실까지 손수 안내를 해 주셨다.

절박한 위기를 벗어난 자만 느낄 수 있는 안도감이 찾아왔고 세상을 다 가진 이가 누리는 행복함도 찾아왔다. 화장실에 들어올 때와는 다르게 개선장군의 모습으로 당당하게 화장실을 빠져나왔다.

그런데 내가 어느 쪽에서 온 것인지가 도저히 기억이 나지를 않았다. 내가 서 있는 위치는 하필이면 복도의 거의 중앙이고 양쪽에서는 비슷비슷한 교실들의 소리만 들렸다. 입학한 지 몇 달이라도 지났다면 선생님의 음성으로라도 구분이 되었을텐데 난 입학한 지 며칠도 되지 않은 찐신입생이었다. 게다가 실명하고 보행 훈련이라는 것을 제대로 받아본 적도 없는 내겐 정교한 방향감각이라는 게 있을 리 없었다.

왼쪽 끝으로 갔다가 오른쪽 끝으로 갔다가 몇 번을 반복해도 내가 있던 교실이 어디였는지 판단이 서지를 않았다. 낯선 건물에 뭔가 나타날 것 같은 두려움은 걸음 속도를 느릿느릿하게 만들고 있어서 수십 번은 왔다 갔다 한 것 같은 느낌이었지만 겨우 한두 번 정도 왕복을 했을 뿐이었다.

문 앞에 어정쩡하게 서 있는 나를 부르시는 선생님의 음성을 듣고서야 겨우 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난 볼일이 좀 오래 걸렸을 뿐 하나도 헤매지 않았다는 척을 하며 들어왔다. 그렇지만 선생님은 물론 친구들조차도 내가 얼마나 허둥대고 고생을 했을지 다 알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도 했다. 난 교실문에서 내 자리를 찾아가는 것도 아직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점심시간에 식당을 갈 때도, 체육 수업이나 음악 수업 시간에 이동수업을 할 때도 난 꽤 오랜 시간이 지날 때까지 친구들의 도움을 받거나 헤매거나를 반복했다. 다른 친구들에겐 일상적인 움직임이 내겐 매순간이 도전이었다.

작은 건물 내에서도 그럴 정도였으니 운동장을 내려가거나 그 옆에 있는 공중전화를 혼자 찾아가는 건 이번 생 안에는 불가능한 일로 여겨졌다.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고 한 학기가 지나고 학년이 바뀌었다. 수백 번 교실을 옮겨 다니고 수천 번쯤 화장실을 찾아가면서 내게도 익숙함이라는 감정이 생기기 시작했다.

급한 볼일이 생기면 살짝 달려보기도 하고 배가 고플 땐 학교에서 몇 골목은 떨어져 있는 떡볶이집을 찾아가기도 했다. 이번 생엔 도저히 혼자 갈 수 없을 것만 갔던 운동장에서 전력 질주하면서 축구를 하는 날도 찾아왔다. 만주벌판처럼 광활하게 느껴지던 학교가 언제 어디든지 몇 걸음이면 갈 수 있을 만큼 작은 동산으로 다가왔다.

교문 밖은 여전히 위험한 불가능 투성이여서 내 걸음은 뒤뚱거렸지만 교문 안으로만 들어오면 교실이든 기숙사든 씩씩하게 다닐 수 있었다.

내가 사는 세상은 보이지 않는 사람에겐 낯설거나 불편하거나 어려운 것들이 너무 많다. 화장실 가는 것 같은 일상적인 일도 낯선 곳에만 가면 또다시 도전해야 하는 과제가 된다. 길을 찾는 것이나 나눠주는 종이에서 정보를 얻어내는 것, 새로운 일에 적응하는 것 등이 나에겐 매순간 불가능으로 다가올 때가 많다. 그렇지만 난 보이지 않는 채로 30년 가까이 살았고 많은 것이 학교의 화장실처럼 내게 편안한 익숙함으로 바뀌어왔다.

내가 뛰어놀 수 있는 곳은 이제 작은 학교보다는 수십 배 수백 배 넓어진 세상이 되었다. 아직은 입학했던 오래 전 학교의 그것들처럼 찾아가기도 도전하기도 어려운 일이 많지만 결국은 그때의 운동장처럼 내게 편안하게 뛰어놀 공간이 되리라고 확신하며 오늘도 나의 세상을 한 걸음씩 늘려나간다.

[더인디고 THEINDIGO]

한빛맹학교 수학 교사, "우리는 모두 다르다"를 주장하는 칼럼리스트이자 강연가이다. 밴드 플라마의 작사가이자 보컬이다. 누구나 불편하지 않은 세상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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