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혼걷이굿 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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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얼굴을 숙인 채 맨말로 앉아 있다./사진=픽사베이

이튿날 새벽, 부황한 꿈속을 헤매던 여자는 여자의 비명에 퍼뜩 눈을 떴다. 싸늘한 불길감이 전류처럼 그녀의 등골을 타고 내렸다. 여자는 종석의 방 앞에 서서 혼이 나간 나색으로 저기, 저기, 하며 허우적대며 손짓을 하더니 이내 스르르 까부라졌다. 방안으로 뛰어들어간 여자는 우뚝 그 자리에 뻣뻣하게 굳어버리고 말았다. 창문틀에 박힌 못에 맨 끈에 목을 휘감은 종석의 몸이 허공을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울지 마.”

여자는 쪼그리고 앉아 연신 어깨를 들먹이는 소년의 등을 다독인다. 갑작스런 손길을 느낀 소년이 흠칫 놀래며 바짝 고개를 쳐들고는 여자의 눈을 쏘아본다. 눈빛에 알 수 없는 노기가 짙게 묻어 있는 듯해 여자는 제풀에 목을 움츠렸다. 소년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손회목을 낚아챈다. 몸을 뒤틀며 잡힌 손목을 빼려고 애를 써보지만 소년의 아귀힘은 의외로 완강하다. 소년의 손아귀에서 제 힘으로는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달은 여자는 체념하듯 물끄러미 소년의 앳된 얼굴을 쳐다본다. 아직 귀밑에는 솜털이 보송하게 남아있다. 그녀의 손목을 잡고 는적대던 소년이 실실 웃음을 흘리며 여자의 귀에 속살거린다.

“이건 비밀인데, 나 엄마가 보고 싶어서 죽겠어. 근데 집에 가려면 날개가 있어야 되잖아. 아, 이 엿 같은 지구에 발바닥이 쫙 붙어서 날 수가 없다구. 쓰벌.”

비밀을 털어놓은 소년은 그제야 편안한 표정으로 씩, 웃어 보이고는 손아귀에서 힘을 풀었다. 그리고는 더 이상 그녀에겐 흥미가 없다는 듯 들고 있던 비닐봉지를 허공에 빙글빙글 돌리면서 계단참으로 지칫지칫 걸음을 옮긴다. 그 뒤를 여자는 발맘발맘 따라 올라간다. 소년이 랩송을 흥얼거린다. 그 음색이 물에 젖은 솜처럼 무겁고 어둡다.

“언젠가 너는 내게 말했지. 세상엔 사랑 따윈 없다고, 세상엔 꿈 따윈 없다고, 삶은 그냥 사는 거라고 말했지. 그 말을 듣고 나는 울었지. 웃다가… 웃다가… 웃다가… 울었지, 울었지.”

소년의 왜소하고 마른 등이 몹시 추워 보인다. 그녀는 얼른 가방을 뒤져 보랏빛 털장갑을 꺼내 소년의 얼어터진 손에 끼워준다. 그리고는 귓가에 속삭였다.

“날고 싶음 날아가 버려. 아주 멀리.”

소년이 갸웃이 여자의 얼굴을 쳐다보다가는 쑥스러운 듯 제법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훌쩍 올라가 버린다. 여자도 곧 뒤따라 올라갔지만 5층 복도는 텅 비어 있다. 흥얼대는 노랫소리만 남아 어둔 복도를 떠돌고 있는 듯하다. 소년은 정말로 날아간 걸까?

불목하니 노인의 등에 업혀 인근 여관방에 누울 때까지도 여자는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무당의 목소리가 동생 종석의 어릴 때 음성과 똑같다고 기억해 낸 순간부터 시작된 발작은 노인이 당골에서 가져온 듯한 따끈한 대추차를 입술에 흘려 넣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노인이 대추차를 입안에 흘려 넣어주며 혼잣말처럼 지껄였다.

“인연이라는 거 쇠심줄모냥 질기고 모질기는 허지만서두 어쩌것슈? 죽은 사람 사무쳐 찾을 맘이랑 묵지 말고 몸 추스르는 대로 얼렁 있던 곳으로 되돌아가유.”

이튿날 온종일 싱겅싱겅한 여관방에 시르죽은 듯 누워 앓던 여자는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겨우 몸을 추슬렀다. 골목 어귀로 길게 드리워진 노을을 밟으며 여자는 당골 쪽으로 걸음을 제겨디뎠다. 무엇을 어쩌겠다는 속셈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무당의 얼굴이라도 한번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래야만 무거운 발길을 돌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당골에는 이미 구경꾼들로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여자는 인파에 밀리면서도 한사코 대문 안으로 비집고 들어가 장독대에 몸을 숨겼다. 마당 한가운데 화톳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더인디고 THE INDIGO]

오래 전에 소설을 썼습니다. 이제 소설 대신 세상 풍경을 글로 그릴 작정입니다. 사람과 일, 이 연관성 없는 관계를 기꺼이 즐기겠습니다. 그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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