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혼걷이굿 9화

0
70
구름 위로 둥근 광선이 비친다./사진=픽사베이
구름 위로 둥근 광선이 비친다./사진=픽사베이

둔중한 징소리가 울리자, 발이 들어올려지고 방문이 열렸다. 여자는 마른침을 삼켰다. 열린 방문 틈으로 비죽이 흰 외씨버선이 힐끗거렸다. 이윽고 짙은 남빛 쾌자(快子)에 치렁한 협수를 받쳐 입은 무당이 머리에 전립을 쓰고 부채로 얼굴을 가린 모습으로 나타났다. 시끌벅적하던 구경꾼들은 저도 모르는 위압감에 짓눌린 듯 자라목을 하고 무당을 쳐다봤다. 얼굴을 가린 부채가 접히자 이내 백랍 가면을 쓴 것 같은 희디흰 무당의 얼굴이 드러났다. 긴 소맷자락을 펄럭이며 무당이 사방을 휘둘러보자 삽시간에 침묵이 덮쳐왔다. 무당의 얼굴을 정면으로 보는 순간 여자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숨이 턱 막혀왔다. 한 켜나 되게 흰 분으로 주름살을 감추긴 했지만 축 처진 눈가와 남색 내리닫이 동정 위로 드러난 목에 찍힌 푸른 반점은 화인(火印)처럼 또렷하게 보였다.

“천왕문(天王門)을 열자꾸나!”

높고 카랑한 악다구니였다. 징, 꽹과리, 아쟁, 장구가 일시에 울음보를 터뜨리자 무당이 제상을 중심으로 휘돌았다. 꽹과리의 미친 듯한 요동질에 무당의 몸부림이 빨라지자 구경꾼들도 한껏 고조된 분위기에 휩쓸리듯 넋을 놓은 모습들이었다. 땀을 흘리며 춤을 추던 무당이 제상을 향해 네 번 큰절을 올리고 밥그릇에 숟가락을 꽂아 세우고는 돌연 장독대를 올려다봤다. 순간, 장독대에 몸을 숨기고 있는 여자와 눈길이 정면으로 부딪쳤다.

집안으로 들어선 여자는 벽등 스위치를 켜고 난방장치를 작동한다. 그리고는 가스불 위에 커피포트를 올려놓는다. 외투를 벗어 아무렇게나 내팽겨치고는 소파에 몸을 묻는다. 몸이 물에 젖은 솜뭉치처럼 무겁다. 전화 응답기의 명함만한 액정화면에 3이란 숫자가 점멸하고 있다. 물 끓는 소리가 자글자글 들려온다. 여자는 소파에서 일어나 응답기의 재생버튼을 누르고는 주방 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삑, 거친 숨소리가 잠시 들리더니 이내 부장의 흥분한 듯한 목소리가 우렁우렁 들려온다.

“아무리 곰곰 생각해도 너랑 헤어지고는 못 살겠어. 그래, 네 말대로 모든 걸 포기할게. 집사람도, 새끼들도 다 쓰레기통에 콱 처박을 거야. 사랑해, 사랑한다구. 그러니깐, 제길, 암튼 날 배신하면 차라리 널 죽여버리겠어. 듣고 있는 거야?”

이내 거칠게 수화기를 놓는 소리가 들린다. 여자는 투깔스런 머그컵을 꺼내 뜨거운 물을 붓는다. 결국 그는 아무것도 버리지 못할 것이다. 사십대의 그가 대체 어떻게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사랑만을 쫓아 내게로 올 수 있단 말인가. 그가 무료한 삶을 견디기 위한 모험으로 선택한 것이 나와의 사랑이었고, 섹스였다. 사랑으로 인해 포기할 것이 많은 자와의 사랑은 언제나 실패가 예정된 쿠데타에 불과하다. 일주일 후쯤 그와 나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다시 만나 무의미한 대화를 나누며 무의미한 섹스를 할 것이다.

삑, 소리가 들리고 이내 전화는 툭 끊어지고 만다. 갑작스럽게 응답기가 돌아가자 전화를 건 상대는 잠시 당황한 듯 허둥대다가 수화기를 놓아버린 듯했다. 삑, 이번에도 역시 말이 없다.

“나, 종석 에미다.”

여자의 손에 들린 머그잔이 바닥에 떨어져 나뒹군다. 뜨거운 커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전기에라도 감전된 듯 꼼짝도 않고 서 있다. 여기서 전화가 끊긴다. 아니다. 전화를 끊은 것이 아니라 여자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있다. 싸락싸락 테이프 돌아가는 소리 너머로 연신 쿨쩍이는 소리가 이명처럼 아득하게 들려온다.

[더인디고 THE INDIGO]

승인
알림
66058bc023b3b@example.com'

0 Comments
Inline Feedbacks
View all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