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승준의 다름알기] 인덕션 쓰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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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덕션/사진=픽사베이
▲인덕션/사진=픽사베이

[더인디고 = 안승준 집필위원]

안승준 집필위원
안승준 더인디고 집필위원

우리 집에 ‘인덕션 레인지’가 들어왔다. 잠시 머물던 숙소나 다른 집에서 본 적은 있었지만 매일 생활하는 집에 가스레인지 아닌 가열 도구가 싱크대에 고정된 것은 생애 처음의 사건이었다.

가스 밸브도 불이 나오는 화구도 없는 물건의 첫인상은 깔끔하고 안전해 보였다. 튀어나온 스위치 같은 것도 복잡한 배선도 없어서 요즘의 트랜드는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그렇게 깔끔한 디자인은 내가 느끼는 가장 불편한 부분이기도 했다. 어떤 것이 버튼인지 열의 강도는 어떻게 조정하는지 냄비는 어디에 올려놓아야 하는지 손으로 만져서는 아무런 단서가 느껴지지 않았다. 음성 가이드가 내장되어 있긴 했지만 그것도 레인지의 구조를 모르면 큰 도움이 될 리 없었다.

“이것은 전원 버튼이고 이만큼 옆으로 가면 열의 강도를 조절하는 숫자 버튼이야. 그 옆에는 위 화살표, 아래 화살표가 있는데 이것으로도 열을 올리고 내릴 수 있어. 화구는 여기 그리고 여기야.”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친구 앞에서는 잘 알아들은 척 했지만 한 번 짚어주는 것만으로 온통 밋밋한 기구의 구조를 알 수는 없었다. 이런 상황을 모르고 시도한 도전은 아니었지만 생각보다 어려웠다.

해법이 보이지 않는 며칠이 지나갈 때쯤 동생의 도움으로 버튼에 점자가 붙여졌다.

‘아! 그때 말하던 버튼의 위치가 바로 여기였구나!’

전에 들었던 버튼의 위치와 간격에 대한 설명이 이제야 조금씩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으로 보였지만 또 다른 문제가 있었다.

터치식 버튼에 붙여놓은 점자는 내가 조작을 할 때뿐만 아니라 버튼의 위치를 탐색하려고 손을 움직일 때도 예민하게 반응했다.

좋은 기계라 그런 것이겠지만 보이지 않는 나에겐 오히려 불편함이 되었다. 한 번에 위치를 찾기 힘든 나 같은 사람은 만져진 점자를 기준으로 다른 버튼을 찾아가야 하는데 손에 닿기만 해도 눌리는 버튼들은 끓고 있는 냄비의 불을 끄기도 하고 얕은 불에서 조용히 끓여지던 음식을 펄펄 끓여서 졸아 버리게도 했다.

한번은 모든 버튼을 잠그는 버튼을 의도와 다르게 건드려서 기구가 아무런 작동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기도 했다. 고민 끝에 기존 점자를 모두 떼어내고 새로운 점자를 터치 버튼의 위쪽에 새로 붙였다. 만족이었다. 아무리 점자로 위치를 탐색해도 의도하지 않은 터치가 발생하지 않았고 원하는 동작은 점자 밑의 진짜 버튼을 터치할 때만 정확히 반응했다. 라면도 끓이고 찌개도 데워 먹고 전도 부쳐 먹었다. 조금 흘러넘친 것은 행주로 닦아 내면 흔적도 없이 깨끗해지고 그제야 ‘인덕션 레인지’를 쓰는 장점을 알 것 같았다.

뭔가 익숙해지는 편안한 느낌으로 어제도 인덕션의 전원 버튼을 눌렀다. 아니 누르려고 했다. 분명 누르려고 했는데 전원 버튼이 없었다. 다른 버튼들도 흔적만 남기고 사라진 것들이 많았다. 버튼 위쪽에 붙여놓은 고무 재질의 점자들이 화구의 열기 때문에 녹아버렸다. 당황스러웠지만 세 번째 점자 스티커를 만들었다. 이번엔 터치 버튼 아래쪽을 택했다. 버튼 터치가 맘대로 되어서도 안 되었고 화구의 열기 때문에 녹아버리는 일도 없어야 했다. 성공적이었다. 물론 현재까지로 한정했을 때 성공적이긴 하다. 이제 나도 ‘인덕션 레인지’로 요리하는 남자가 되었다.

사용 가능성이 전혀 보이지 않던 기구가 내 손에 익숙해지기까지는 몇 번의 시행착오가 필요했다. 동생의 아이디어로 점자가 붙여지고 그 위치가 위로 아래로 옮겨지는 동안 멀쩡한 요리를 망치기도 하고 몇 시간 동안 땀을 삐질삐질 흘리기도 했다. 좀 더 솔직히 말하면 괜스레 답답한 마음에 장애가 불편하다 느껴지기도 했다. 그렇지만 실수하고 실패하는 시간을 거치면서 비로소 난 기기와 친해지는 시간을 허락받았다.

되돌아보면 다수의 편리성에 맞춰진 대부분의 가전제품도 그랬다. 이리 만져보고 저리 만져보고 나서야 구조를 파악했고 이 사람이 도와주고 저 사람이 수정해 주고 나서야 나름의 동작 방식을 깨달았다. 점자를 붙이는 것도 볼록한 스티커로 표시하는 것도 사용해 보면서 고치고 옮기고 하면서 최적의 위치를 찾았다.

시행착오는 시간이 흐르고 반복되면서 결국 나에게 맞는 방법을 알려주었지만, 대부분의 상황과 다르게 포기를 선언한 적도 있다. 성공으로 가는 길의 실수들이야 물론 의미 있는 경험이지만 도움 없이는 사용할 수 없다는 항복 선언도 궁극적으로 내겐 긍정적 가치를 준다. 새로운 제품을 사용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실수는 그 결과가 성공이든 실패든 또 다른 물건을 고르고 사용법을 탐색할 때 적지 않은 도움을 준다.

세탁기 조작에서의 실수로부터 깨달은 정보는 TV나 에어컨을 고를 때도 유효하다. 밥솥도 전자레인지도 인덕션 레인지도 과거의 시간으로부터 쌓아 올린 실수들이 오늘 내 집에서의 편리한 시간을 만들었다.

난 누구보다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사는 사람이기에 그 실수는 끝이 아닌 과정임을 잘 안다. 실수하고 돌아가는 것은 조금 늦어지는 것일 뿐 가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실수가 두려워서 움직이지 않는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사용해야 할 제품이 눈앞에 있다면 어떻게든 만져보고 작동해 보고 실패해 보기를 바란다. 기기는 전에 없던 편리함으로 응답할 것이다. 지금 어려운 문제와 마주했다면 일단 부딪히고 움직이기를 바란다. 당장에 느껴지는 시행착오의 순간들은 더 나은 삶으로의 반가운 초대장임을 머지않아 느끼게 될 것이다.

[더인디고 THE INDIGO]

한빛맹학교 수학 교사, "우리는 모두 다르다"를 주장하는 칼럼리스트이자 강연가이다. 밴드 플라마의 작사가이자 보컬이다. 누구나 불편하지 않은 세상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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