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승준의 다름알기] 서빙하는 아나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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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장면. 이미지=픽사베이
▲인터뷰 장면. 이미지=픽사베이

[더인디고 = 안승준 집필위원]

안승준 집필위원
안승준 더인디고 집필위원

방송 출연을 하다 보면 연예인이나 유명방송인들과 만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사회자와 게스트로 마주하기도 하고 앞뒤 코너의 손님으로 지나치다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때때로 연락처를 교환하지만 바쁜 스케줄 때문에 깊은 인연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다른 방송국이나 무대에서 다시 만났을 때는 친한 친구를 만난 듯 격한 반가움으로 인사를 나누지만 많은 사람을 만나는 직업 특성상 습관적 인사치레인 때가 더 많다.

대기실에서 만난 나에게 어떤 연예인들은 “정말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시지요?”라고 인사를 건네지만 난 이전에 그 분을 만난 기억이 없다. 연예인들 틈에 서 있는 나를 이름 없는 방송인쯤으로 넘겨짚고 의례적 인사를 건넨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깊게 이어지는 몇 안 되는 인연은 더 소중하고 특별하다.

그녀는 9시 뉴스 앵커였고 당시 최고의 인기프로그램이었던 ‘도전 골든벨’의 사회자였다. 밤에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DJ였고 베스트셀러 여행 작가였다.

본인이 진행하는 프로그램에 고작 한두 번 출연한 게 전부인 일반인 게스트와 연락처를 나눌 이유도 없었고 따로 만날 까닭은 더더욱 없었다.

새해가 시작되던 날 라디오 부스에 초대되었을 때도 다른 가수의 콘서트에 함께 갔을 때도 그냥 착한 마음을 가진 유명인의 봉사라고 생각했지만 동네 분식점에서 아무렇지 않게 마주 앉아서 라면을 먹고 종종 소주도 한 잔 기울이면서 어느 틈에 누나 동생 하는 진짜 친구가 되었다.

내가 춘천에 있는 학교에서 근무하던 어느 날엔 혼자 자취하는 모습이 궁금하다면서 직접 운전을 하고 찾아온 적이 있다. 인기 아나운서의 방문에 동료 선생님들은 사인과 사진 부탁을 했고 급기야 두 선생님은 식사 자리까지 동석했다.

그 지역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으로 유명한 민물 회를 먹던 우리는 모두 다섯 명이었다. 나를 포함한 교사 세 명, 아나운서 그리고 그녀의 친구가 한적한 가든에 둘러앉았다. 귀한 손님을 대접한다고 찾은 곳이라 경치는 좋았지만, 음식을 주문하기 위해서는 매번 일어나서 멀리 떨어진 카운터로 걸어가야 했다.

문제는 나와 동료 선생님들은 모두 시각장애인이었고 누나의 친구는 외국인이었다는 데 있었다. 물수건, 소주 한 병, 매운탕을 주문할 때도 멀쩡하게 달려가서 주문하고 받아올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었다.

하필이면 음식까지 맛있어서 우리의 주문은 회 한 접시, 소주 한 병, 튀김 한 접시… 하면서 계속 이어졌고 그 때마다 왕복달리기를 해야 하는 사람은 대한민국 대표 아나운서일 수밖에 없었다.

처음 몇 번은 일행들이 그녀에게 미안한 맘을 가지기도 했지만 대화가 이어지고 서로의 성격을 확인한 다음엔 주저하거나 거리끼는 것도 없어진 듯했다.

한참 동안의 만찬이 끝나고 계산을 위해 카운터에 도착한 우리를 사장님은 이리저리로 살펴보시면서 의아해 하셨다. 누나와 다니다 보면 얼굴이 알려진 터라 이리저리 살펴보는 것에 익숙해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여러 번 망설이던 사장님은 참고 있던 질문을 던지셨다.

“물어봐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도대체 어떤 모임이세요? 난 비싼 음식도 시키고 술도 많이 먹으면서 아나운서가 모든 시중을 들기에 굉장히 대단한 분들이 왔나 보다 했는데 몸이 불편하신 분들이 나와서 좀 놀랬어요.”

사장님은 현실을 보면서도 아나운서와 장애인들의 매칭은 뭔가 다른 의미가 있지 않고서야 이해하기 어려워 하는 것 같았다. 상상 속 별채의 식사 모임을 고관대작들의 은밀한 사교 모임 정도로 여긴 듯했다.

“이 선생님들 정말 대단한 분들이셔요.”라고 웃으면서 말하는 누나의 농담 덕분에 사장님의 궁금증은 더욱 증폭되는 것 같았지만 우리는 웃으면서 식당을 벗어났다. 우리가 가진 고정관념이나 편견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 근거 없이 단단해진다.

연예인이나 유명인들은 일반인과 친구가 되기 힘들고 그 대상이 장애인이라면 현실성은 더욱 떨어진다. 봉사나 시혜의 대상으로만 여겨지는 장애인들과의 술자리는 뭔가 굉장히 특별한 사연이 있지 않고서는 이해하거나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들의 착각일 뿐 누나와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특별할 것 없는 친한 친구다.

내가 대체로 도움을 많이 받기는 하지만 그것이 장애 때문만은 아니고 가끔 난 그녀의 마음을 위로하거나 도움을 줄 수도 있다.

의례적 인사를 건네고 비즈니스폰의 연락처를 나누는 연예인들을 만나면서 나조차도 여러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그것은 전부도 아니고 진짜도 아니다. 우리는 누구나 친구가 될 수 있고 언제 어떤 역할도 나눌 수 있다.

연예인도 유명인도 장애인도 어떠한 다름도 다 그렇다.
나의 오랜 친구인 손미나 작가에게 오늘은 글로 안부를 전한다.

[더인디고 THE INDIGO]

한빛맹학교 수학 교사, "우리는 모두 다르다"를 주장하는 칼럼리스트이자 강연가이다. 밴드 플라마의 작사가이자 보컬이다. 누구나 불편하지 않은 세상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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