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승준의 다름알기] 고기 구워주는 시각장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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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를 굽는 안승준 교사. 장갑에 물을 묻혀 고기를 숯불위에 올려놓고 있다. 사진=유튜브 캡처
▲고기를 굽는 안승준 교사. 장갑에 물을 묻혀 고기를 숯불위에 올려놓고 있다. 사진=유튜브 캡처

[더인디고 = 안승준 집필위원] 요즘 한 유튜브 채널에 고정으로 출연하고 있다. 척수장애로 사지마비 판정을 받은 버럭중사님과 내가 하는 일은 일반적인 사람들이 생각하는 장애에 대한 모습과는 거리가 좀 있다. 둘은 서로의 눈과 팔다리가 되어주면서 제작진의 커피를 사 나르고 쇼핑을 한다. 눈이 보이지 않는 내가 다른 장애인에게 밥을 먹여주고 청각장애인이 아닌 우리가 수어를 배운다.

안승준 집필위원
안승준 더인디고 집필위원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생각도 시도도 하기 힘든 내용에 우리가 도전하는 것은 제작진의 이력에 장애와 관련한 부분이 없기 때문인 것 같다. 특수교육이나 장애학 같은 학문의 전공자라면 품위 있는 지팡이 보행이나 예의 바른 반찬 위치 안내법 같은 교양있는 영상을 제작했을 것이다. 전동휠체어 조작이 서툴러서 빙판 위에서 몇 바퀴 빙빙 돌았다는 척수장애인의 말에 김연아 같다는 표현은 편집되거나 삭제되었을 것이다. 시각장애인과 척수장애인에게 쇼핑을 하라는 것도 라면을 끓이라는 것도 장애를 책으로 배운 사람들이라면 제작회의에서부터 통과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제작진들에겐 그런 형식적인 고려 같은 것은 없거니와 그런 콘텐츠를 직접 수행해야 하는 우리 둘에게도 특별히 거부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처음엔 조금은 당황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새로운 시도들이 현실적으로 가능하다는 맛을 보면서 그런 마음들은 더욱 과감한 도전에 대한 욕구로 변해왔던 듯하다.

고스톱을 치고 오목을 두던 우리는 캠핑에 도전하기로 했다. 비 주룩주룩 오는 장마의 초입이었지만 우리에게 그런 건 조금 더 재미있어지는 소재일 뿐이었다. 45도는 족히 넘어 보이는 경사를 올라가는 전동휠체어는 분량을 뽑아낼 수 있는 반가운 장면이었다. 생수 6병, 수박 한 통, 고기 3kg, 과일, 음료수, 각종야채, 라면을 양손 가득 들고 가야 하는 건 시각장애인인 내게 주어진 임무였지만 그 또한 신나는 일이었다. 어느 캠프에서도 내게 주어지지 않았던 역할을 나도 할 수 있다고 느끼는 그 감정이 오히려 좋았다.

자리를 잡고 음식을 차릴 땐 버럭중사님이 지시를 하고 내가 움직이면서 하나씩 준비가 되어갔지만 다른 때 다른 곳이었다면 우리 둘에게 그런 것을 시킬 가능성은 없었을 것이다. 굳이 사지마비 장애인에게 봐 달라고 하지 않고 느릿느릿 움직이는 시각장애인에게 짐을 옮기라고 할 필요도 없다. 그렇지만 오늘의 캠프에서만큼은 우리 둘만이 인력의 전부이고 그래서 우리가 진짜 주인공이 되었고 비로소 진정한 캠프 체험을 할 수 있었다.

캠프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고기 굽기! 여기에서도 예외가 존재할 리 없었다. 야채를 한 장 한 장 정성스럽게 씻고 고기와 불판을 굽기 좋은 위치로 이동시켰다. 수동식 토치로 15분 정도 숯에 불을 붙일 때 움직이는 건 나였지만 잘되는지 안전한지를 지켜보는 것은 중사님이었다. 달구어진 불판을 보면서 난 고깃집 아들만 믿으라고 큰소리를 쳤지만 어디 가서 내가 고기를 구워봤을 리가 없었다. 두꺼운 목장갑에 물을 잔뜩 묻히고 손으로 고기를 불판에 올렸다. 뜨거웠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다시 물을 더 묻혔다.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일이라 확신은 없었지만, 꼭 한번 해보고 싶기도 했다. 익은 것은 어떻게 아냐는 물음에 ‘눌러보면 다 알지요’라고 했지만 내가 그것을 알아차린 건 그렇게 대답하고 다시 만져본 이후였다. 판에 눌어붙은 고기 때문에 뒤집기가 힘들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내친김에 소시지도 잘라서 굽고 맛도 보았다. 걱정하던 마음과 달리 소시지는 잘 구워지고 맛도 있었다. 중사님 입에 넣어주고 나도 더 먹고 하는 사이 고기가 다 익었다. 아니 다 익은 것 같았다. 상추에 고기를 올리고 마늘도 넣고 고추도 넣어서 중사님 입으로 넣어주었다. 나 한 입 중사님 한 입 먹는 고기는 생애 처음으로 내가 구운 고기였다. 맛있었다. 내가 구워도 고기는 맛있었다. 장애 있는 우리가 느릿느릿 일해도 캠프는 재미있었다.

▲안승준 교사가 고기 굽기에 이어 라면을 끓이고 있다. 사진=유튜브 캡처

라면도 끓이고 수박도 자르고 우리의 캠프는 다른 이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1박을 하지 못하는 것이 아쉬울 정도로 우리는 온종일 알차게 놀았다. 마지막 인터뷰를 하면서 캠프도 해 봤으니 이젠 무인도도 가보자고 했다. 진심이었다. 사람들과 어울려 살면서 보이지 않는 나는 많은 배려를 받는다. 눈이 보이면 빠르게 할 수 있는 일을 괜스레 나에게 시키지는 않는다. 사지를 움직이지 못하는 중사님도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생각보다 우리도 할 수 있는 게 많다. 좀 느리긴 해도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하고 싶은 일이었고 하는 것만으로 즐거웠다.

우리는 또 다른 촬영과 새로운 도전을 할 것이다. 앞으로의 녹화가 또 어떤 모양이 될지 늘 기대가 크다. 우리의 영상들이 현실의 장애인들에게도 좀 더 넓은 세상으로의 경험을 선물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더인디고 THE INDI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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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빛맹학교 수학 교사, "우리는 모두 다르다"를 주장하는 칼럼리스트이자 강연가이다. 밴드 플라마의 작사가이자 보컬이다. 누구나 불편하지 않은 세상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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