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승준의 다름알기] 말하는 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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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에서 넷플릭스를 켜고 있다. 사진=Unsplash
▲TV에서 넷플릭스를 켜고 있다. 사진=Unsplash

[더인디고 = 안승준 집필위원]

가전제품이나 인테리어 소품을 고를 때 나 같은 시각장애인의 욕구는 눈 보이는 사람들과는 우선순위가 좀 다르다.

안승준 집필위원
안승준 더인디고 집필위원

시각장애인이 다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난 벽에 걸어 놓을 그림이나 실용적이지 않은 장식품들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이 없다. 꽃이나 화분을 고를 때에도 예쁜 것보다는 향기가 좋거나 촉감이 좋은 것들을 선호한다. 그렇지만 아무리 혼자 사는 집이라고 하더라도 이따금 찾아올 손님들에 대한 배려도 필요하다는 주변의 조언으로 인해 내 집마저도 일반적인 사람들의 욕구들을 반영할 때가 있다. 보이지 않더라도 LED등은 달아야 하고 색은 모르지만 최소한의 조화로움은 고려해야 하는 것이 그런 것들이다.

이번에 TV를 구매할 때에도 내 관심은 그것의 본래 목적과는 관련 없이 스피커의 음질 따위에 집중되어 있었다. 화면이 아무리 크더라도 내겐 큰 의미가 없고 VOD 콘텐츠나 유튜브 같은 사이트에 연결할 수 있는 스마트 기능도 화면의 메뉴를 보고 스스로 조작할 수 없는 나에겐 굳이 추가 비용 지불하면서 비싼 가전 구매해야 하는 옵션 선택의 영역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역시나 이번에도 주변의 조언은 나의 선택을 눈 보이는 다수의 일반적인 욕구들에 맞출 것을 친절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권하고 있었다.

사실 화면은 작고 스피커의 음질은 훌륭하고 시각장애인이 접근할 수 없는 스마트 기능을 떼어낸, 내가 원하는 종류의 TV는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다. 벽면을 가득 채운 최신의 TV를 바라보는 손님들의 감탄은 내게도 기분 나쁜 일은 아니었지만, 스마트TV라는 이름과는 어울리지 않게 혼자서는 겨우 채널을 움직이고 볼륨조절을 할 수 있는 정도로 내 조작의 영역이 한정되어있다는 것은 비싼 가격과 비교되어 나의 아쉬움을 극대화했다. 음질 좋은 사운드 바라도 사고 싶었지만 TV 자체를 크게 볼 마음이 들지 않았기에 길지 않은 고민 끝에 결정을 철회했다.

여러 번 손님이 오가고 그때마다 영화도 보고 인터넷 콘텐츠도 감상했지만 혼자 있을 땐 그림의 떡일 뿐이었다. 동료 선생님께서 방문하셨을 때도 매번 그랬던 것처럼 TV 리모컨은 내 손이 아닌 방문하신 분들의 손으로 건네졌다. 그런데 IT 기기에 관심 많은 선생님의 꼼꼼한 메뉴탐색이 진행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우리 집 TV에서 들리지 않던 소리가 출력되기 시작했다.

“음성지원 메뉴입니다.”

“넷플릭스 메뉴입니다.”

“유튜브 메뉴입니다.“

다른 이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조작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스마트 기능의 메뉴들을 음성지원 기능을 통해 읽어주고 있었다. 몇 가지 설정을 더 조정한 뒤에는 인공지능 스피커와의 연결로 음성명령까지 내릴 수 있었다.

“유튜브 열어줘“

“BTS 노래 틀어줘“

어머니가 오시면 7080 노래도 틀어드리고 시각장애인 친구들이 오면 화면해설 영화도 틀어주었다. 리모컨은 눈 잘 보이는 손님의 손이 아닌 내 손에서 명령이 내려졌다. 혼자 있을 때도 TV 앞에 앉아있는 시간이 늘어갔다. 특별히 볼 콘텐츠가 있지 않아도 어떤 메뉴가 있는지 탐색해 보는 것만으로도 신세계를 느꼈다. 기쁜 마음으로 ‘사운드바’도 하나 구매했다. 다른 사람들의 욕구만 생각하고 나 스스로에겐 쓸데없는 비싼 제품을 샀다고 생각했는데 이것은 나에게도 충분히 필요하고 쓸만한 TV였다. 다수만 즐길 수 있는 도구가 아닌 우리가 함께 즐거워할 수 있는 유니버설 디바이스였다.

요즘 우리 집에는 말하는 가전제품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 밥솥도 인덕션도 에어컨도 스피커도 말을 한다. 음성명령으로 노래를 틀고 조명을 켜고 공기청정기를 제어할 수도 있다. 몇 년 전이라면 시각장애인들에겐 사용이 어려웠거나 불가능했던 것들이 조금씩 가능의 영역으로 옮겨오고 있다. 덕분에 나는 내 집에서 스스로 할 수 있는 것들을 늘리고 혼자서도 즐거울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나고 있다. 제품을 연구하고 만들어 내는 사람들의 작은 변화는 한 사람의 삶을 바꿀 수 있는 큰 힘을 가지고 있다.

우리 집의 모든 물건이 말문이 터지고 나와 친구가 되는 날을 바라본다. 들리지 않아도 보이지 않아도 움직일 수 없어도 원하는 제품을 구매하고 조작할 수 있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으면 좋겠다. 나와 스마트TV를 친한 친구로 만들어 준 모 전자 관계자 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더인디고 THE INDIGO]

한빛맹학교 수학 교사, "우리는 모두 다르다"를 주장하는 칼럼리스트이자 강연가이다. 밴드 플라마의 작사가이자 보컬이다. 누구나 불편하지 않은 세상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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