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석의 낮은 시선으로부터] 양화(良貨)가 악화(惡貨)를 구축하는 사회를 사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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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휠체어/사진=더인디고
▲휠체어/사진=더인디고

[더인디고=이용석편집장]

이용석 편집장
더인디고 편집장

새벽녘에 눈 떠 희붐한 동살이 제법 날카롭고 차다. 휠체어 림을 미는 손이 금세 차가와져서 손끝이 곱으면 이제, 겨울인가 싶어 내심 겁부터 더럭 난다. 원체 추위를 타는 체질이기도 하려니와 눈이라도 옴팡 내려 빙판길이라도 생기면 오금이 저릴 만큼 두렵고 힘겹다. 넘어지고 자빠지는 일이야 워낙 다반사여서 그럭저럭 견딜만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그 허랑한 무너짐이 하염없이 서럽기도 하다. 이럴 때면 조력자 한 사람쯤 곁에 두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 장애인활동지원서비스라도 받아보면 어떨까 싶지만 장애 재판정을 신청하고 종합조사를 받는 일이 영 번거롭고 찜찜한 노릇이다.

직접 서비스로는 거의 유일한 장애인활동지원제도가 도입된 후 중증장애인의 일상생활은 급격하게 개선되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물론 급여량이나 서비스 대상이 되기 위한 치열한 장애증명 등 불만이야 있겠지만 일상생활 전반에 걸친 인적 지원이 가능하다는 것만으로도 진일보한 제도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런데 장애등급 단계적 폐지 이후 서비스의 대상이 되기 위한 장애인들의 분투는 더욱 치열해졌고, 서비스를 받을 만큼의 장애 정도인지를 구분하려는 국가의 감시 또한 점점 더 견고해졌다. 장애등급제 단계적 폐지 이후 판정대상의 범위가 모든 장애인으로 넓어지고 구간도 4구간에서 15개 구간으로 더욱 촘촘해진 상황이어서 경쟁자가 늘어난 만큼 급여량을 지키기 위한 보이지 않는 노력은 더욱 치열해진 느낌이다.

며칠 전, 장애인활동지원제도 관련한 회의에 참여했다가 뜻밖의 지적에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듯 충격을 받았다. 회의에 함께했던 한 인사는 장애의 개념이 의료적 관점에서 사회적 관점으로까지 확장되다 보니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판정 도구도 그만큼 범위가 넓어졌다는 거다. 이를테면 의료적 관점으로만 판단했던 기존의 장애등급에서는 서비스 제공 판정 방식도 그만큼 간명했는데, 장애등급제가 단계적으로 폐지되고 대상도 모든 장애인으로 확대되었을 뿐만 아니라 장애 개념도 사회적 관점까지 봐야 하니 서비스 제공 대상을 판정하는 방법도 복잡해지고 촘촘해질 수밖에 없으니 장애인 당사자는 장애 증명이 더욱 어려워졌다는 의미였다. 장애의 개념은 그동안 꾸준히 진화해 왔다. 의료적 관점에 사회적 관점까지 포함한 권리적 관점, 즉 ‘장애인이 차별 없이 인간으로서의 제반 권리를 향유하고, 장애의 특성과 욕구에 적합한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권리’로까지 확장했다. 하지만 장애 개념의 확장은 장애 정도를 판정해 서비스를 제공하는 입장에서는 대상을 걸러내고 구분하는 방식을 더욱 엄격하게 하는 이유로 작용하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기존에는 의료적 관점의 장애정도에 국한되었던 판정방식이 이제는 환경적 요인까지 볼 수밖에 없어 결국 인적 서비스가 반드시 필요한 장애인 당사자에게는 오히려 걸림돌로 작용하게 되는 셈이다.

장애의 권리적 관점의 포괄적 해석은 국가가 규정한 장애등록을 하지 않더라도 ‘장애’라는 개념만으로도 각 개인의 욕구에 맞는 서비스를 받을 수 있어야 하는데, 정작 현실은 새로운 패러다임의 변화가 판정도구의 문항만을 늘리게 되는 결과가 되고, 결과적으로 서비스를 받기 더욱 어렵게 되었다.

양화(良貨)가 악화(惡貨)를 구축하는 꼴이다. 16세기 영국의 경제학자 그레샴은 당시 영국 정부가 재정 부담을 줄이기 위해 순도가 떨어지는 은화를 발행했는데 사람들은 순도가 높은 은화는 저장하고 순도가 낮은 은화만 사용하는 현상을 빗대 나쁜 것들이 좋은 것들을 압도하는 사회 병리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고 했지만, 장애 개념의 새로운 진보성은 도리어 서비스 대상과 급여량 판정을 번거롭게 하는 결과로 나타나는 셈이다.

아무튼 겨울이다. 올겨울은 내년 대통령 선거로 온 나라가 한층 후끈 달아올라 추위조차 느끼지 못할 테지만 예년보다 더 춥겠다는 예보를 들은 터라 겁부터 더럭 앞선다. 5년마다 찾아오는 정치적 이벤트는 더 나은 사람을 선택하는 게임이 아니라 덜 나쁜 후보를 골라야 하는 보물찾기가 된 느낌뿐이어서 5년 전, 수백만의 시민이 광장에서 밝혔던 촛불의 의미는 가뭇없이 사라졌다는 애석한 마음만 오롯하다. 후보들은 국가 운영 능력을 증명하기보다는 상대의 약점을 악착같이 물고 늘어지는 싸움에 익숙하고, 익숙한 만큼 집요한 악전고투가 될 듯하다. 장애 개념의 진보화가 도리어 서비스 대상을 고르는 조건만 까다롭게 한 것처럼, 더 나쁜 후보를 헤집어 내는 수고로움은 양화가 악화를 구축하는 지난한 고통이며, 겪지 않아도 될 찜찜한 경험으로 기억될 듯하다. 부디, 모두 이 미혹의 시대를 낱낱이 톺아가며 살아남을 일이다.

[더인디고 THEINDIGO]

오래 전에 소설을 썼습니다. 이제 소설 대신 세상 풍경을 글로 그릴 작정입니다. 사람과 일, 이 연관성 없는 관계를 기꺼이 즐기겠습니다. 그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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