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석의 세상풍경] 좀비의 역습, 디지털 공간을 점령한 규환(叫喚)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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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유튜브 화면 캡처
  • 내 삶의 위치에서 보이는 열 가지 풍경, 넷

[더인디고=이용석 편집위원]

우리시대의 좀비들, 그들만의 공간

이용석 더인디고 편집위원

창문 밖 세상은 온통 봄볕에 흥건히 젖어 한껏 평화롭다. 퍼드러지게 핀 봄꽃의 그림자들이 담벼락 한 귀퉁이로 스며드는 늦은 오후다. 전염병 창궐 이후 휴일만 되면 한여름 엿가락처럼 늘어지는 시간을 보내는 게 여간 곤혹이 아니어서 평소에는 그다지 눈여겨보지 않던 대단찮은 창밖 풍경마저 이제는 제법 살갑다. 외출을 삼가고 방구석에서 지루하고 따분한 시간을 보내는 소일거리로는 볼거리가 그중 낫다고 여긴 탓에 뒤져본 영화가 좀비영화다. 세상에, 좀비라니…

우리가 영화를 통해 알게 된 좀비의 이미지는 조지 A 로메로의 영화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좀비(zombi)의 어원은 니제르어와 콩고어 nzambi에서 비롯되었고 영어로 치자면 GOD, 즉 신(神)에 해당하는 의미다. 굳이 따지고 보면 좀비는 육체적인 개념보다는 정신적인 영역의 존재인 듯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좀비, 그러니까 좀비에게 물려 죽은 후 되살아나는 좀비는 아이티의 부두교(Voodooism)에 근간을 두고 있는 전형적인 종교적 부활 개념이다. 부두교 주술사가 비약을 이용해 산 사람을 가사상태로 빠지게 하고는 장례 후 무덤을 파내어 다시 살려놓는데, 이때 깨어난 존재가 좀비라는 것이다.
이렇듯 죽은 자의 부활은 인간의 오래된 꿈이고, 그 꿈을 위한 종교의 이적(異蹟)이 부활한 사람인 좀비를 탄생시킨 것이다. 그래서 사람의 터무니없는 꿈이 만들어낸 좀비는 판타지(Fantasy)라는 가상공간 안에서만 존재해야 하는 것이다.

디지털 공간이라는 판타지 속의 좀비들

하지만 우리는 판타지가 아닌 세상 밖으로 튀어나온 무려 26만여 명의 살아있는 좀비들을 목도한다. 텔레그램이라는 SNS를 이용하는 디지털 성범죄. 그 가상의 디지털 공간 속의 수많은 N번방의 괴물들로 온 나라가 발칵 뒤집히고 사람들은 분노했다. 그 칙칙하고 어둔 공간을 드나든 26만 여명의 괴물들이 악머구리 끓듯 득시글대는 상상만으로도 모골이 송연할 지경인데 이들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언론의 가해자 서사는 날선 분노를 더욱 부채질했다. 그들이 일상에서 보여준 평범함은 이미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가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에게서 읽었던 ‘악의 평범성’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스크린을 온통 핏빛으로 물들이는 좀비들 또한 좀비가 되기 전에는 평범한 시민들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행위와 행위자 간의 이 황당한 비연계성은 N번방의 괴물들과 좀비의 행위가 정확하게 겹치는 지점이다. 또한 이 비연계성으로 인해 N번방의 괴물들이 디지털 공간에서 욕망을 표현하는 방식은 좀비가 사람을 공격하는 방식과 일치한다.
그런데 한 가지 다른 점은 판타지에서의 좀비는 먼저 욕망을 드러내고 난 후 인간들에 의해 그 욕망을 추방당하는데 비해, N번방의 좀비들은 돈과 협박이라는 도구와 수단을 통해 욕망을 끊임없이 확대하고 증폭시킨다는 것이다. 욕망의 확대와 증폭은 N번방의 좀비들이 피해자들의 일상을 파괴하고 종속화시키며 삶을 혼란케 하기 위한 과정이다. 그래서 N번방의 괴물들은 디지털이라는 가상의 공간 안에서 신이 된다. 다시 말하면 가상의 공간에서 새롭게 괴물로 부활해 스스로 사람이라는 인식론적 범주와 경계를 맘껏 허물어 버리고, 사회적 가치관 혹은 정의 및 사회적 규범 안에 속하지 않다고 여기거나 스스로 일탈을 자처했던 것이다. 그래서 더욱 공포스러운 존재들이며 위협적이다.
판타지 세계 안의 좀비에게 사람의 피와 살이 필요했다면 N번방의 괴물들은 오직 자신들의 가학적 유희를 위한 피해자만 필요할 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현실의 괴물들로부터 도망치지 말아야 한다. 더럽더라도 도망치지 말고, 두렵더라도 마주서야 한다. 그 추악한 괴물들과 내가 다르다는, 허접한 구경꾼의 양심 대신에 함께 분노하고 피해자들의 고통에 귀 기울여야 한다. 우리사회가 ‘사람이 모여 사는 세상’이라는 새삼스러운 자각이 가능하다면 N번방이라는 디지털 공간에서 저질러진 일들은 낱낱이 기억되어야 하고, 괴물들은 단죄되어야 한다.

N번방의 괴물들을 잊지 않기 위해서

올봄은 꽃구경 대신 우리가 겪고 있는 두 개의 역병으로 기억될 듯하다. 하나는 우리의 일상을 온통 헤집어놓은 바이러스의 창궐. 그리고 또 하나는 26만 여명이 괴물로 변해 디지털 공간에 서식하며 사람을 물어뜯고 피를 빨았던 좀비들의 실체와 추악한 욕망의 덩어리. 이 두 개의 잔혹하고 처연한 경험을 겨우 겪어내더라도 어쩌면 우리는 그 이전의 시절로 되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잊지 말아야 한다. 혀가 뽑히고 펄펄 끓는 구리 쇳물에 온몸이 담가지거나 철퇴로 짓이겨지는 형벌의 지옥. 이 지옥에서의 고통이 오로지 바이러스 확진자들과 N번방의 피해자들 몫으로만 남는 순간, 바이러스와 26만 여명의 괴물들은 다시 되살아나 우리의 대단찮은 양심을 헤집어놓을 것이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핑계로 ‘양심적 거리두기’로 구경꾼 역할에만 만족하지 않아야 한다. 당신들과 나, 우리 모두 사람이지 않은가?
[더인디고 The Indigo]

오래 전에 소설을 썼습니다. 이제 소설 대신 세상 풍경을 글로 그릴 작정입니다. 사람과 일, 이 연관성 없는 관계를 기꺼이 즐기겠습니다. 그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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