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호의 차별 속으로] 계단 앞에 멈춰선 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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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지역 한 행정복지센터 내 계단, 사진=이민호 집필위원
▲대구 지역 한 행정복지센터 내 계단, 사진=이민호 집필위원

[더인디고=이민호 집필위원]

이민호 집필위원
▲이민호 더인디고 집필위원

한 달 뒤인 2022년 3월 9일은 제20대 대통령 선거가 있는 날이다. 각종 매체에서 투표가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지난 선거에서 심각한 차별과 배제를 경험한 나에게는 와닿지 않는 말이다.

2017년 3월 10일 국정농단 사태로 인해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당하고 제19대 대통령 선거 일정이 5월로 확정되었다. 첫 대통령 재보궐 선거이고, 역대 가장 많은 후보가 등록한 선거였다. 정권 교체에 대한 열망으로 선거 분위기도 매우 뜨거웠다. 나에게도 그 뜨거움에 동참할 기회가 생겼다.

본 투표 날인 5월 9일은 개인적인 용무로 인해 투표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5월 4일 근무 중 인근 행정복지센터에 설치된 사전투표소로 향했다. 시민의 권리인 참정권을 행사하러 간다는 기대감에 발걸음이 가벼웠다. 하지만, 그 가벼움은 오래가지 못했다. 사전투표소가 행정복지센터 2층에 설치되어 있어서 투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계단으로 올라가면 되겠지만, 나는 전동휠체어를 이용하는 사람인 까닭으로 승강기가 없으면 층간 이동이 불가능하다.

선거관리위원회 직원들이 내 신분증을 주면 투표용지를 대신 받아 줄 수 있고, 1층에 설치된 임시기표대에서 투표할 수 있다고 안내했다. 하지만 소중한 개인정보가 담긴 신분증을 제삼자에게 준다는 것이 불편했고, 보이지 않는 과정에서 비밀선거 원칙이 지켜지지 않을 것 같아 투표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승강기를 설치하면 간단히 해결될 문제를 왜 이렇게 일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결국, 나의 민주주의는 계단 앞에 멈춰 섰다. 국가가 2층에서 나를 내려다보며 “네 표는 필요 없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계단이라는 권력 앞에서 나는 초라해졌다. 계단은 직립보행 하는 인간이 좁은 면적 안에서 다른 층으로 이동하기 위해 만들어진 장치지만, 계단은 권력을 나누는 공간이기도 하다. 높낮이에 따라 권력의 크기가 달라지는데 높은 곳에서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낮은 곳에 있는 사람을 적나라하게 관찰할 수 있다.

관찰의 권력을 가장 잘 표현해주는 것이 ‘파놉티콘 감옥’이다. 평원의 원 가운데 간수탑이 위치하고 360도 주변으로 감방이 있다. 감방과 마주한 간수탑의 창문은 매우 작은데, 감방에 있는 죄수들은 간수를 볼 수 없다. 하지만 간수들은 자신의 모습을 숨긴 채 죄수들을 감시할 수 있다.

자신을 숨기고 타인을 관찰하고 감시할 수 있는 자리는 커다란 권력을 가진다. 하지만 시선보다 더 확실하게 타인을 관찰하는 방법은 높은 곳에 자리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권력을 가진 사람들을 ‘높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높음의 권력을 잘 보여주는 것은 지구라트의 계단이다. 지구라트는 수메르 문명 때 건축되었다. 힘없는 자들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국가의 경제와 정치를 총동원하여 거대한 지구라트를 만들었다. 크고 높은 계단을 설치하고 집단적 경외감을 위한 신화를 창조하기 위해 꼭대기에 신전을 만들었다. 오직 신전에만 신이 임재하고 제사장만이 신을 영접할 수 있다고 말하며 제사장은 신의 대변인으로서 그의 말은 곧 신의 말씀이었다.

결국, 계단을 오를 수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으로 나뉘는데 계단에 올라 꼭대기에 갈 수 있는 제사장은 신의 권력을 이양받은 ‘높은 사람’이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낮은 사람들’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지구라트의 계단은 권력의 상징이며, 억압자와 피억압자를 나누는 기준점이 된다.

투표소 계단 앞에서 민주주의의 꽃을 꺾어야만 했던 내 모습은 수천 년 전 수메르 문명 때 계단에 올라가지 못한 사람들과 중첩된다. 국가 중대사를 결정짓는 자리에 함께할 수 없었던 사람들과 대통령을 뽑는 과정에 참여할 수 없는 사람들은 참으로 닮아있다. ‘권리의 실현’을 위해 높은 곳에 가 닿을 수 있는 방편인 승강기는 반드시 설치되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수천 년 전 수메르 문명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제20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모든 사람이 앞다투어 자신을 뽑아달라고 민주주의의 꽃은 선거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시민이 투표권을 행사할 방법을 마련하는 것에는 아무도 관심이 없다.

2017년 제19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주의를 잃어버렸던 ‘나’와 ‘나들’, 2022년 제20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나’와 ‘나들’이 민주주의를 되찾기를 바란다. 민주주의의 꽃인 선거가 모든 사람에게서 꽃 피우길 바란다. 꽃을 피우기 위한 토양을 조성하는 데에 정부와 선거관리위원회가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길 바란다.

[더인디고 THE INDIGO]

대구 지역 다릿돌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권익옹호 팀장으로 활동하는 장애인 당사자입니다. 국내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장애 인권 이슈를 ‘더인디고’를 통해 함께 고민하고 대안을 모색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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