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석의 잡썰] 살아남은 자의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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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나뭇가지에도 쌓일 만큼 많이 내렸다.
▲눈이 나뭇가지에도 쌓일 만큼 많이 내렸다. 사진=Unsplash .

[더인디고=이용석 편집장]

이용석 편집장
▲이용석 더인디고 편집장

눈이 소복하게 쌓여 딛는 발자국마다 지난 한 해의 시름이 고인 듯 웅숭깊습니다. 사선으로 희끗희끗 날리는 눈발은 여전히 지천이어서 짙은 어둠에 묻힌 외투 끝을 어지간히 헤집어 적십니다. 밤새 눈이 내릴 듯합니다. 설 쇤다고 일찌감치 내려온 시골집 조붓한 마당은 어느새 눈밭입니다. 이른 저녁부터 대선정국을 안주 삼아 퍼마신 술 탓에 한껏 불콰해진 이마를 문지르던 나는 지칫대며 눈 쌓인 마당 끝에 서서 언뜻 당신을 기억해냈습니다.

잘 지내고 계시지요?

문득 당신의 요즘이 궁금해집니다. 당신을 기억해 낸 이유는 밤새 내린 눈 탓일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며칠 전 만난 친구와의 조우 내내 당신의 이야기를 나눈 탓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반백의 나이가 되도록 우리의 어린 기억을 지배하는 당신은, 한때 우리에게는 영원한 총통(總統)이었으며 까마득한 벼랑 끝에서 만난 구세주(救世主)이기도 했습니다. ‘쪼꼬릿’을 기억하시지요? 그 기막히도록 절묘한 매질은 지금 생각해도 그 창의적 방식에 혀를 내두를 지경입니다.

다섯 손가락을 오므려 모으게 해놓고 그 끝을 내려치는 방식이라니… 손가락 끝에만 상처를 남기면서도 뼈마디마다 파고드는 통증은 손끝에서 시작되어 온몸을 휘돌아 마침내 등골을 타고 전해졌으니까요. 왜 그 매질이 ‘쪼꼬릿’으로 불렸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습니다. 당시 그곳은 캐나다의 한 선교단체의 원조 물품이 지원되었고, 그 물품 중에는 알약 크기의 초콜릿이 있었으니 아마도 그 과자를 집는 손 모양에서 유래한 것은 아닐까 짐작할 뿐입니다. 우리는 당신의 ‘쪼꼬릿 대!’라는 명령 한마디에 모두 침상 마루 한끝에 일렬로 앉아 손가락을 한껏 오므려 내밀어야 했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매질을 시작했습니다. 어깨 짬을 활짝 열어 머리 뒤까지 들어 올린 매는 정확하게 우리의 손끝에 떨어졌고, 그럴 때마다 우리는 온몸을 비틀어 떨면서도 매질이 끝날 때까지 맞는 손을 거둬들이지 못했습니다. 행여 비켜 맞기라도 하면 손톱이 들뜨거나 깨져 며칠을 고생해야 했으니까요. 침상 마루에 손가락 끝이 일렬로 정돈되도록 몇 번이나 두드려 점검했는지 모릅니다.

매질에는 공부시간에 떠들거나 관물대가 어질러져 있거나 취침 준비가 늦는 따위의 그럴듯한 이유가 있는가 하면 밥을 늦게 먹는다거나, 물건을 잃어버렸다는 이유도 황당한 매질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물론 우리도 맞기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매일 밤 먼지가 뿌옇게 쌓인 침상 마루 밑으로 기어들어 가 당신의 이 황당한 독재에 대항할 모종의 계획을 세웠습니다. 바깥세상에 투서하거나 무시로 드나드는 자원봉사자들에게 이 사실을 세상에 알리게 하는 방법 등 꽤 다양한 방안들을 고민했지만, 그저 허망한 모래성 쌓기에 불과했습니다. 당시 우리는 지나치게 어렸고, 어렸지만 일찌감치 철이 들어서, 철든 만큼 무모하지 못했습니다. 될 수 있으면 통증을 줄여 맞는 방법을 공유하기도 하고 또 한 대라도 적게 맞는 영악한 대답을 짜냈을 뿐입니다.

당신은 권력이었습니다.

어린 것들조차 당최 납득할 수 없는 규칙의 강요와 무시로 날아오는 매질도 그저 묵묵히 따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당신이 아닌 당신이 가졌던 권력이 우리에게 주어졌던 그 알량한 혜택을 빼앗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우리에게 그곳은 바깥세상보다 안락한 둥지였기에 그 따스한 둥지 밖으로 내몰리지 않기 위해서는 당신을 거역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당신은 영웅이었습니다. ‘장애’에도 불구하고 우수한 성적으로 대기업에 입사했던 당신은 ‘장애’를 가진 우리에게는 ‘불굴의 의지로 장애를 극복한 훌륭한 선배’였던 것입니다. 당시 거의 모든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보도될 만큼 세상의 칭송이 자자했으니까요. 그래서 당신은 그곳의 스타였으며, 우리가 배워야 하는 ‘장애를 가진’ 삶의 표상이었으며 그렇기에 거역할 수 없는 권력이었던 것입니다.

이른 새벽, 밤새 분 바람에 문풍지 울던 방문 틈 사이로 보이는 마당 한가득 눈이 쌓였습니다. 마당에 겹겹이 쌓인 눈밭은 산등성이를 타고 오른 햇살에 사금파리처럼 반짝였습니다. 분망한 노루잠을 비집던 꿈 마디마디에서 어린 시절의 당신을 보았습니다. 이제 나는, 당신의 행방을 궁금해하지 않습니다. 그저 소문으로만 당신을 느낍니다. 서울 근교의 작은 도시에 터를 잡고 그럭저럭 잘 살아가고 있다는 소문에는 부당함에 화가 났고, 부랑인이 되어 떠돌다 서울 허름한 골목에서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거나 퉁퉁 부은 시신으로 한강에 떠올랐더라는 흉흉한 소문에는 후련함 대신에 황당한 배신감이 들기도 했습니다. 물론 당신의 생사는 내게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당신이라는 존재가 우리의 기억 안에 남아있는 한 당신은 살아있는 존재이며, 당신이 누렸던 그 권력 또한 여전히 실체 하는 힘이니까요.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당신이 누렸던 그 알량한 권력은 당신만의 것이 아닌 세상의 것이었고, 당신이 휘둘렀던 매질은 세상이 우리에게 보내는 혹독한 시선에 비하면 그다지 고통스럽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견뎠을 세월과 우리가 살아낸 시간의 두께가 다르며 당신이 외치는 ‘쪼꼬릿’이 이제는 용케 살아남은 우리에게는 어린 날을 추억하는 기쁨의 외마디 탄성쯤으로 여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당신, 부디 당신의 기억 속에서 우리를 지워주시기 바랍니다.

[더인디고 THE INDIGO]

오래 전에 소설을 썼습니다. 이제 소설 대신 세상 풍경을 글로 그릴 작정입니다. 사람과 일, 이 연관성 없는 관계를 기꺼이 즐기겠습니다. 그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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