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미경의 컬처토크] 공익광고 삐딱하게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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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유튜브 화면 캡처
  • 때로는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

[더인디고=차미경 편집위원]

나는 장애인이지만… ?

사진_차미경
차미경 더인디고 편집위원

“나는 장애인이지만 내 일에 장애는 없습니다.”
차 한 잔 마시며 잠깐 쉴까 하고 틀어놓은 TV 화면에서 마침 이런 공익광고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한국장애인고용공단이 장애인 고용 장려를 위해 제작한 장애인식개선용 광고였다.

다양한 유형의 장애 직장인들이 자신의 일터에서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누구나 그렇듯 때론 지각하는 날도 있고 실수하는 날도 있고 결과가 좋지 않은 날도 있겠지만 우리도 다르지 않다, 다른 직장인들처럼 우리도 실수하고 부딪히며 성장할 것이다… 뭐 대충 그런 내용이었다.

나는 장애인이지만…? 그런데 이 대목이 문득 목구멍에 걸렸다. 이번 총선에서 어느 정당의 비례대표로 나온 한 장애인 후보도 그렇게 말했었다. ‘나는 장애인이지만 성악가입니다!’라고…

사실 장애인이어서 일을 못 하거나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어떤 직업을 갖지 못할 이유가 전혀 없는데도 불구하고 장애인인 것과 직장인인 것, 장애인인 것과 성악가인 것이 마치 도통 될 법하지 않은 소리나 되는 듯이 말한다. 지레 ‘나는 장애인이지만…’ 이라는 사족에 가까운 말을 달아서 장애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굳이 재확인시키고 부각시킬 필요가 있을까.

물론,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많은 장애인들은 자신의 능력만큼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일할 수 있는데도 일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편견과 차별을 겪고 있는 것이 현실이긴 하다. 그런 현실이 뼈 아프도록 안타까운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 해도 굳이 ‘나는 장애인이지만…’ 이라고 매사에 전제를 다는 것은 어색하지 않은가. 마치 ‘나는 여자지만 일할 수 있습니다’ 라거나 ‘나는 흑인이지만 가수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비록 장애가 있지만’, ‘장애인임에도 불구하고’ 등과 같은 표현은 결국 우리가 그토록 잘라내고 싶었던 ‘장애 극복’이라는 틀에 엉겨 붙은 꼬리표 같은 것은 아닐까. 그 꼬리표는 ‘이 정도면 됐지?’ 정도의 한계 표시를 그어줌으로써 장애인에게 주어질지 모르는 과도한 기대치나 책임으로부터 보호해 주겠다는 일종의 ‘깍두기 표시’, 즉 열외자 표시처럼 느껴지고 한다.

장애인을 부탁해!

‘한 번만 더 알아봐 주세요!’
‘한 번만 더 바라봐 주세요!’
‘한 번만 더 생각해 주세요!’

이런 표어가 흐르던 광고 영상은 작년 달리는 KTX 기차 안에서 보았다. 창밖이 지루해 고개를 돌리다가 기차 안에 설치된 화면에서 우연히 만난 영상이었다. 그 영상 역시 한국장애인고용공단이 직장내 장애인식개선을 위해 제작한 것인데 내용은 대충 이렇다.

휠체어를 탄 장애인 직원을 비장애인 직원이 뒤에서 밀어주며 식당에 들어선다. 그러나 회식 자리로 예약된 듯한 그 식당은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휠체어로 들어갈 수 없다. 순간 휠체어를 탄 장애인 직원이 난감한 표정이 되고 그 위로 ‘한 번만 더 알아봐 주세요!’라는 자막이 올라온다. 또 다음 장면은 시각장애를 가진 직원이 박스가 아무렇게나 어질러진 통로를 지나가며 힘들어하는 모습이고 다른 비장애인 직원은 무심하게 자기 일만 하고 있다. 그 위로 ‘한 번만 더 바라봐 주세요!’라는 자막이 나온다. 이어서 마지막 장면은 청각장애를 가진 직원이 다른 직원들에겐 다 공지된 사안을 혼자만 몰라서 당황하는 곤란한 상황에 ‘한 번만 더 생각해 주세요!’라는 자막이 붙는다.

세 가지 사례 모두 비장애인 직원들에게 ‘도움과 배려’를 요구하는 내용이다. 도움을 받는 쪽은 장애인이고 베푸는 쪽은 비장애인인 확실한 포지션이 설정되어 있다. 이 영상의 제안대로 비장애인 직원들은 장애인에 대한 도움과 배려 요구에 기꺼이 응하는 마음이 들까?

영상 속 상황대로라면 비장애인 직원들은 바쁜데도 회식 자리까지 일부러 신경 써서 알아봐야 하고 시각장애인 직원 때문에 물건도 통로에 함부로 놓으면 안 되고 청각장애인 직원 때문에 사소한 공지조차도 일일이 메신저로 띄워야 하는 번거로움도 감수해야 한다. 시간 있고 여유 있을 때는 기꺼이 해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럴 수 없을 때에는…? 어느 순간 장애인 직원은 함께 일하기 부담스러운 존재로 여겨지게 될지도 모른다. 어떤 원칙이 아니라 배려나 도움 같은 사람의 호의나 ‘착함’에만 기대는 방식은 안타깝지만 언제든 사람을 소외시킬 수 있다.

소위 ‘인식개선’이란 명분 아래 장애인은 도와줘야만 하는 존재로 손쉽게 규정되거나, ‘장애가 있지만’, ‘장애에도 불구하고’ 등의 전제로 한정되며 철저하게 대상화되곤 한다. 그렇게 ‘우리’가 아니라 ‘그들’로 분리된다. 따지고 보면 장애인 편에서 편들어 주자고 하는 일인데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편들어 주는 시누이가 더 미워지는 형국이 돼 버리고 마는 것이다.

다르게 말하기

이제 좀 다른 방법으로 이야기해 보면 어떨까?
우선, 장애인이지만, 장애가 있어도, 장애에도 불구하고… 따위의 ‘장애’에 대한 부정적 전제는 떼어 버리고 얘기해 보자. 앞서 얘기했듯이 ‘난 여자이지만’이나 ‘난 흑인이지만’이란 어색한 전제를 하지 않는 것이 훨씬 더 자연스럽다. 각 사람의 다름에 대하여 일일이 ‘나는 코가 크지만’이라든가 ‘나는 머리가 노랗지만’ 같은 불필요한 전제를 나열하지 않는 것처럼.

그리고 무슨 법칙이라도 되는 양 장애인의 휠체어를 밀어주면서 등장하는 전형적인 장면은 이제 지양하자. 도움은 필요한 순간에 주어져야만 고마운 것이지 불필요한 도움은 부담일 뿐이다.

통로에 어질러진 박스를 치우는 일이 왜 꼭 시각장애인 직원을 위해서만 필요한 일인가? 비장애인 직원이 시각장애인 직원을 위해 ‘도와줘야 할’ 일이 아니라 그저 모두를 위해 ‘필요한’ 일일 뿐이다. 부주의한 순간 박스에 걸려 넘어질 위험은 언제든 누구에게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시각장애인 직원을 위해서만이 아닌 직원 모두를 위해 필요한 일이라는 인식이 훨씬 평등하지 않은가. 청각장애인 직원 사례도 마찬가지. 꼭 청각장애인 직원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직원 모두를 위해 필요한 방식을 고민해 보면 더 다양한 대안들이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잘못된 이해나 인식에서 오는 피해는 고스란히 장애인들이 겪는다. ‘장애인이니까 도와줘~’ 식의 어설픈 시혜적 편들기가 미운 이유다. 도움은 장애인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구성원 모두가 서로 주고받는 것이다. 그리고 공동체는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희생이나 헌신으로 유지되지도 않는다. 그런데 일방적으로 한쪽만의 도움과 배려만을 요구하는 지금의 인식개선 방식은 구성원 모두를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장애인을 위한’ 직장이 아니라 ‘모두를 위한’ 직장을 함께 만드는 것으로, 도움의 시혜자와 수혜자를 명확하게 구분 짓는 것을 너머 서로 돕는 모두를 위해…우리의 생각도 유니버설한 개념으로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더인디고 The Indigo]

라디오 방송과 칼럼을 쓰고 인권 강의를 하면서 나름의 목소리로 세상에 말을 걸어왔습니다. ‘easy like Sunday morning...’ 이 노래 가사처럼 기왕이면 일요일 아침처럼 편안하게 문화를 통한 장애 이야기로 말을 걸어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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