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석의 잡썰] 자유로움의 혁명을 꿈꾸었던 휠룡인들

1
170
▲쇠사슬로 만들어진 휠체어 바퀴 /사진편집=더인디고
▲쇠사슬로 만들어진 휠체어 바퀴 /디자인=더인디고

[더인디고=이용석 편집장]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의 지하철 이동 시위가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의 페북질로 우리 사회의 주요 이슈가 되자 사람들은 문득, 이 많은 장애시민들은 그동안 어디에서 살고 있다 거리로 쏟아져 나왔는지 궁금해진 듯하다.

이용석 편집장
▲이용석 더인디고 편집장

거리에서든 무시로 드나드는 식당이나 카페, 약국은 물론이고 동네 편의점에서조차 볼 수 없었던, 수용시설이나 방구석에나 처박혀 있어야 할 사람들이 갑자기 나타나서는 출근길 서울 지하철을 마비시키고 있다니 황당하고 그저 의외인 모양이다. 처음에는 육중한 휠체어를 탄 몇몇이 나타나 지하철을 타고 내리기를 반복했다. 어떤 이의 휠체어는 고작 십 센티 남짓한 승강장과 열차의 단차에 걸려 바둥거려 밀어주기도 했고, 또 어떤 이의 휠체어는 비좁은 열차 통로를 비집고 지나가 속으로 짜증을 내기도 했다.
그 생경한 풍경을 겪으면서 사람들은 우리 사회 어딘가에도 장애시민들이 살아가고 있었다니 신기해 했다. 얼마나 살기 고될까 싶어 안타까운 마음도 들었지만 그들의 반복 승차가 열차의 운행을 지체시킨다는 교통공사의 차내 방송이 들려오고 그 행위가 매일 반복되면서 일상의 불편으로 맞닥뜨리자 얼떨결에 욕이 튀어나왔을 것이다. 그런 와중에 곧 집권당이 될 정당의 대표, 무려 하버드 대학을 다녔다는 젊고 똑똑해 보이는 정치인이 이들 장애인들은 선량한 시민들을 ‘볼모’ 삼아 ‘최대 다수의 불편’을 야기한다고 비판하자, 그나마 약자에 대한 배려심과 스스로 한껏 누려왔던 알량한 동정심으로 불편을 참던 사람들은 여보란듯 분노를 터트렸고, 왜 공권력은 대체 뭐하냐는 볼멘소리를 쏟아냈다.

“아니, 왜 병신들이 아침부터 지하철을 난다고 지랄이야!”

“정부에서 주는 돈이나 받아 먹고 처박혀 있을 일이지…”

이내, 재기발랄하고 선량한 몇몇 사람들은 휠체어를 사용하는 장애시민들을 ‘휠룡인’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휠룡인은 휠체어와 일본 만화인 ‘원피스’에서 세계정부의 귀족으로 악행을 일삼는 ‘천룡인’의 합성어로 휠체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낮잡아 칭하는 인터넷 멸칭이란다. 그러니까, 장애시민들은 대중교통인 지하철을 멈추게 하는 방식으로 시위를 하면서도 “일반인이면 개 같이 처맞을 짓거리를 해대도 장애라는 이유로 존나 봐주는 천룡인(dcinside.com 마이너 갤러리/철도커뮤니티 모노레일 갤러리에서 발췌)” 같은 존재라는 의미다. 오호라! 그렇게 장애시민들은 선량한 일반 시민들에게 지하철 운행을 멈추게 하는 악행을 일삼으면서도 공권력의 저지를 받지 않는 특별한 귀족으로 등극했다. 고소를 금치 못할 일이다. 지워진 존재에서 갑자기 특권을 누리는 귀족층으로 계급이 상승하기까지 걸린 기간은 고작 석 달이다. 사람들의 타인에 대한 혐오는 이처럼 자신의 이해관계와 밀접하게 엮여 자신이 손해를 본다고 판단되는 순간 거침없이 터져 나온다. 특히 그 상대가 자신보다 약자라고 판단되면 혐오 반응은 공격적인 적개심으로 발전하고 급기야 물리적인 가해로까지 이어진다. 우리는 이미 지난 역사를 통해 경험했지만, 그 경험을 통해 깨달은 것은 자신 만큼은 ‘공격의 대상’이 아니며 사는 내내 아닐 것이라는 황당하고 근거 없는 확신 뿐이다.

80년대 중반, 상도동 가파른 언덕바지 빌라 반지하에 두 평짜리 방을 월세로 얻고 지낼 때 일이다. 한 달에 20여 만원 남짓 월급을 약속받고 다녔던 직장이 신설동에 있어 출퇴근이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매일 택시로 출퇴근하기에는 월급이 빠듯했고, 그나마 노량진역에서 신설동역까지의 경로가 가장 싸고 맞춤했는데 문제는 상도동에서 노량진역까지 어떻게 가야할 지 여간 난감한 일이 아니었다. 버스를 타면 고작 두 정거장 정도였지만 목발을 짚고 다닐 때여서 그 높은 버스를 ‘비장애인’처럼 번듯하게 타기에는 버겁기도 했거니와 동작이 굼떠 운전원과 승객들의 노골적인 불만을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견뎌야 했다. 그래서 생각해 낸 방법이 양손에 장갑을 끼고 양팔로 버스 바닥을 딛고 기어 타는 것이었고 제법 안전하고 빠르게 탈 수 있어 고리눈을 뜨고 노려보는 운전원과 다른 승객들의 볼멘소리는 듣지 않았다.

대신에 노골적인 호기심과 아침부터 못 볼 꼴을 다 본다는 혐오적 눈길에 시달려야만 했다. 하기야, 아침부터 짐승처럼 버스를 기어오르는 광경을 목도했으니 얼마나 황당하고 찜찜했을까 싶기는 하다. 게다가 눈이나 비가 오는 날에는 자빠지고 넘어져 기껏 곱게 차려 입은 입성은 물에 젖고 흙투성이가 된 몰골은 그야말로 거지꼴이었다. 하지만 먹고 살려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암튼 그렇게 한 2년을 견디다 결국 가족의 지원과 갈무리 해둔 돈을 모아 자동차를 샀고 겨우 출퇴근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렇게 30여 년이 지났지만 서울의 시내버스는 변하지 않았다. 되바라진 사람들의 시선도 버겁지만 또다시 기어서 타기에는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나마 타인의 조력이 필요 없는 지하철을 이용해 외출을 계획하지만, 엘리베이터의 위치나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의 동선을 확인하는 절차조차 피곤한 노동이어서 포기하거나 미루기 일쑤다. 장갑을 끼고 버스를 기어오르던 그때에는 그나마 젊은 혈기방장 했고 새파랗게 약이 오른 독기라도 있었지만, 지금은 철지난 늙은 호박처럼 물크러져서 고작 입만 살아 떠드는 허제비일 뿐이다. 짐작컨대 이번 논란이 잠잠해지면 사람들은 또다시 휠룡인들을 잊을 것이다. 한때나마 자신들의 출근길을 훼방하고 평안한 일상을 방해했던 무례한 휠룡인들의 악행 대신에 일 년에 한두 번 접하게 되는 장애시민들의 추레하고 지친 뒷모습을 힐긋거리고는 아주 잠깐 지하철 시위를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내 바쁘고 자유로운 그들만의 일상으로 급히 되돌아갈 것이다.

그렇게 자유로움의 혁명을 꿈꾸었던 휠룡인들의 존재는 시나브로 지워지고 ‘선량하고 멀쩡한’ 그들만의 세상은 민첩하게 ‘정상화’을 회복하게 되겠지. 누구에게만 평범한 일상이 욕심이 되고 과도한 부담인 오늘의 세상은 어쩌면 30여 년 전 내가 겪었던 살풍경한 그때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자유로움’을 꿈꾸었던 휠룡인들은 또다른 방식의 혁명을 이어갈 것이다.

[더인디고 THE INDIGO]

승인
알림
6605ca905b489@example.com'

1 Comment
Inline Feedbacks
View all comments
chamsu@hanmail.net'
이원영
1 year ago

자유는 혁명으로! 권리는 투쟁으로!